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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LP감상회 ‘I Like 골드베르크 변주곡’ 7월 18일

  • 작성자clara
  • 작성일2020-07-16
  • 조회수405

<32LP감상회 ‘I Like 골드베르크 변주곡’>

* 클라라하우스(대전): 718() 3PM

* 포니정홀(서울 삼성동): 725() 4PM

* 해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 문의: 042-861-5999 & 02-2008-8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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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티아나 니콜라예바는 20세기 최고의 여성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와 견줄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아마도 클라라 하스킬, 로잘린 투렉, 미라 헤스 정도일 겁니다.

한 달 안에 완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무려 4회나 했을만큼

암보의 천재였고,

수백 곡의 레퍼토리가 늘 머리 속에 완벽하게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흐 신전의 여사제였습니다.

니콜라예바의 바흐는 교향곡에 맞먹는 스케일감과

너무도 따뜻한 온기를 품은 인간미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페달 사용을 극도로 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레가토 라인으로 그려지는 니콜라예바의 바흐는,

신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어느 평론가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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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련 멜로디야 음반사에서 두 장의 LP로 발매된

니콜라예바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명반 중의 명반입니다.

이번 32LP감상회는 이 멜로디야 LP초반으로 니콜라예바의 바흐를 감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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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또 다른 바흐 신전의 여사제인 로잘린 투렉,

우리나라 음반사 굿인터내셔널에서 발매된 슈투트가르트 챔버 오케스트라의 현악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을 비교해서 감상합니다.

 

남미 원주민의 축제에서 비롯된 관능적인 춤 사라방드’!

이 춤곡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기본틀입니다.

원초적인 춤곡이 위대한 음악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은 가히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32LP감상회에서 그 근원을 파헤쳐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니콜라예바를 모스크바에 갈 때마다 취재했습니다.

아들 키릴을 만나 묘를 찾아 헌화하고

니콜라예바의 모스크바 음악원 클래스를 방문하는 여정은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아래 매거진에 기고한 글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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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피온즈, 딥 퍼플, 카펜터즈로 이어지는 팝과 가요는 LP감상회의 또다른 흥미거리입니다.

 

이 어수선한 때에 클라라하우스 LP감상회에서

힐링이 시간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유혁준 올림

 

* 선곡표 *

 

<클래식> I Like 골드베르크 변주곡

* J.S.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1.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1924~1993.11.22

(멜로디야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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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잘린 투렉 1914~2003

(1958LP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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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슈투트가르트 챔버 오케스트라(현악 오케스트라 편곡)

(굿인터내셔널 발매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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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롤라 보베스코 Lola Bobescu 1919~2003, 루마니아 / 1977LP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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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

목관 5중주 E플랫장조 K.452

(데니스 브레인, 프렌치혼 1921~1957/ 레너드 브레인, 오보에/ 스테판 워터스, 클라리넷/ Colin Horsley, 피아노/ Manoug Parikian, 바이올린/ 1968년 모노 LP음반

 

<가요>

1. 어젯밤 이야기 (응답하라 1988 )

(소방차 1/ 1987LP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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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를 사랑하고도

(전유나 1/ 1990LP초반 노오픈)

 

<& 재즈>

1. A View To A Kill

(영화 007 주제곡/ 듀란 듀란/ 19857인치 싱글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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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Still Loving You

(스콜피온즈/ 198412인치 싱글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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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esperado

(카펜터즈/ 1975LP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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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moke On The Water

(딥 퍼플/ 1972LP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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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o That To Me One More Time

(Captain & Tennille/ 197945회전 싱글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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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숨결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2002110일 오전 러시아 모스크바. 3일 전인, 율리우스 구력을 쓰는 러시아 정교회의 크리스마스인 17일을 전후해서 모스크바에는 30년 만에 혹한이 몰아쳐 수십 명이 동사하는 재앙이 닥쳤다. 추위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12월 말에 러시아에 도착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음악축제를 돌아보고, 이틀 전 모스크바를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였다. 니콜라예바가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했던 모스크바 음악원 앞에서 제자인 피아니스트 미하일 페투호프를 만났다. 역시 음악원 교수인 음악사를 가르치는 클리코바가 동행했다.


미니밴을 타고 한참을 달려 드디어 볼쇼이 피로고프스카야 거리에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에 도착했다. 1703년 피터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기 전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모스크바의 정신을 상징하는 곳이 노보데비치 수도원이다. 외국과의 전쟁을 위해 원정을 떠나기 전 이곳에서 언제나 출정식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듬성듬성 을씨년스럽게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증기가 응결해서 달라붙어 만들어진 눈꽃이 만개해 있다. 정문을 들어서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묘가 한눈에 들어왔다. 러시아의 영혼을 책임진 대부분의 예술가가 이곳에 묻혀있다.


20세기 세계 음악계의 판도는 러시아 출신들이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 후 망명한 음악인들이 서방세계 곳곳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소비에트 연방 또한 폐쇄된 사회의 오명을 떨치기 위해 정책적으로 예술가를 육성했다. 1958년 시작된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가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1934년 구소련 당국은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내세우며 예술인들을 구속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음악인은 자유를 갈구하며 조국을 떠나기도 했고 억압된 체제 속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를 고뇌하며 예술혼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의 양심을 지킨 많은 연주자들은 결국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으며 한 자리에 다시 모여있었다.


고골리, 체호프와 같은 대문호를 위시해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 러시아를 움직였던 예술가들의 묘 수천 기가 정연하게 놓여있다. 이곳에는 예술가의 묘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50년대, 체계적인 문화정책을 입안해서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던 문화부 장관 에카테리나 푸르체바의 비석 또한 예술가와 함께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 문화의 저력이 느껴졌다. 페투호프와 클리코바는 무릅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기적처럼 음악인들의 묘를 하나하나 찾아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은둔의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앙 쉬트코베츠키의 위엄에 찬 묘비를 지나 윗쪽으로 각진 외모만큼이나 반듯한 레오니드 코간의 묘가 나타났다. 가끔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휘황한 바람만이 불어올 뿐 눈 덮인 그의 마지막 자취는 말이 없다. 쇼스타코비치, 오보린, 긴쯔부르그, 스크리아빈, 쉬니트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그렇게도 흠모했던 음악인들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니콜라예바와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는 쇼스타코비치의 묘비 위에는 눈에 덮인 꽃바구니 하나가 단정히 놓여 있다. 최고의 베이스 가수였던 살리아핀도 위풍당당하게 거기에 앉아있다.


드디어 니콜라예바의 마지막 자취. 다른 묘지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페투호프는 서둘러 스승의 묘비명이 보이게 눈을 닦아냈다. 수만리 먼 타국에서 온 동양의 한 이방인이 위대한 음악가의 묘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바흐의 평균율1권의 C장조 주제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살을 에는 추위도 잊고 감격에 ***었다.

 

우리는 지금 피아니스트, 작곡가이자 교육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였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여성이자, 위대한 예술가, 그리고 위대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녀는 쇼스타코비치와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요. 많은 작곡가들이 그녀를 방문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장 훌륭한 연주가였고, 선생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또한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제게 니콜라예바는 제2의 어머니이자 음악의 어머니입니다. 저의 창작의 인생에서 그녀의 중요성은 지대했습니다. 그녀는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했을 때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곡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프십니까?” 라고 되물었지요.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매우 인간적이니까요. 아마도 인간미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바흐 스페셜리스트였던 스승의 앞에서 그녀가 총애했던 제자인 페투호프는 니콜라예바 음악의 핵심은 인간미라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 역시 스승의 대를 잇는 바흐 전문 연주자로 러시아의 글렌 굴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성호를 긋는 제자의 눈에는 끝내 이슬이 맺혔다.

 

 

타티아나 페트로브나 니콜라예바(Tatiana Petrovna Nikolayeva)192453일 러시아 서부 브리안스크(Briansk) 근교의 베지차(Bezhitsa)에서 태어났다. 브리안스크는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약 1시간이 소요되는 브리안스크 합창단으로 유명한 인구 80만의 중소도시다. 니콜라예바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인 키릴 타라세비치(Kyrill Tarassevitch)는 생물학자였다. 1962년에 첫 남편과 사별한 니콜라예바는 1975년 역사학자인 미하일 자고린스키(Mikhail Zagorinsky)과 재혼했으나 그 또한 1990년에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현재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컴퓨터 엔지니어인, 첫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키릴이 유일한 혈육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니콜라예바는 어릴 적부터 음악에 ***어들었다. 이미 4살 때 바흐의 전주곡을 연주했으며 13살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어머니의 스승이기도 했던, 현대 러시아 피아노계의 대부격인 알렉산더 골덴바이저(Alexander Goldenweiser)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1950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바흐 서거 200주년 국제 바흐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니콜라예바는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세계에 그 성가를 높였다. 이 때 심사위원이었던 쇼스타코비치는 그녀의 바흐 연주에 감격해서 24개의 전주곡과 푸가를 작곡해서 니콜라예바에게 헌정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와의 우정은 평생 지속된다.

 

19931123일 니콜라예바는 미국 순회연주의 일환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쇼스타코비치의 프렐류드와 푸가, Op.87 전곡 사이클을 연주하고 있었다. 공연 도중 기분이 좋지 않다며 무대 뒤로 나온 그녀는 쓰러져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몇 일을 더 견디다 결국 그렇게도 갈망하던 영원한 천국의 세계로 들어갔다. 121일 특별기 편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녀의 시신은 다음날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고인의 소망대로 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 후 니콜라예바가 평소 자주 연주회를 가졌던 모스크바 음악원 그레이트홀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비창4악장을 연주했다. 그렇게 거장은 끝까지 음악 속에 묻혀 영면했다.

 

니콜라예바는 모스크바의 가장 높은 7개의 빌딩 중의 하나인 코텔니체스카야(Kotelnitcheskaya)에 있는 국가에서 제공한 아파트에 살았다. 두 대의 피아노를 사용했는데 스타인웨이와 독일제 베흐슈타인이 그것이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매우 아담했다. 그 손에서 편안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피아니즘이 탄생했다. 모든 곡을 외워서 연주할만큼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주제를 노래하곤 했다. 노래는 니콜라예바 음악의 원천이었다. 1년에 80회 이상의 연주회를 소화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니콜라예바는 생전에 50여개 국이 넘는 나라를 방문했다. 그 중에는 일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중국 등 동양의 여러 나라도 포함된다. 내한 무대를 단 한 차례도가지지 못했던 것에 비해 북한에서는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특히 동양의 음식과 철학을 음미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사가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렸다. 이 와중에 그만 오른손이 차 문 사이에 끼어버렸다. 손가락을 심하게 다친 니콜라예바는 그러나, 서양 의술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 약을 바르고 한약을 먹으면서 상처를 완치했다고 한다. 그만큼 동양의 전통을 존중한 까닭이다. 그녀는 음악은 국경을 초월한 국제적인 언어라고 믿었다. 각 민족의 언어는 발음도 다르고 그 나라의 정신도 제각각이지만 음악은 이 모든 것을 통합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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