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자료실] 쇼팽의 음악세계와 쇼팽 스페셜리스트에 대해
본문
● 쇼팽 - 하늘로 가는 피아노 소리
흔히들 우리는 쇼팽을 느낀다고 한다. 쇼팽의 음악은 듣는다기보다는 느낀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새벽 창가로 번져 오는 꿈과 사랑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 감정의 내밀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피아노의 속삭임이다. 쇼팽의 작품은 대부분이 피아노곡이며, 쇼팽으로 인해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비로소 모든 악기 중의 여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팽의 피아니즘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연민과 동정, 슬픔과 기쁨 그리고 공허와 열정을 동시에 생각나게 한다. 그건 바로 ‘하늘로 가는 피아노 소리’ 인 것이다.
오늘도 쇼팽을 듣는다. 지구상에 피아노가 사라지지 않는 한 쇼팽은 같이 존재할 것이다. ‘피아노의 시인=쇼팽’. 진부한 등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21세기를 사는 현재에도 유효하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영원의 진리다. 낭만주의의 선봉에 선 이 가냘픈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는 피아노라는 단 한 가지 악기로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자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자에게는 더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가보티가 저술한 전기의 번역서 제목처럼 ‘하늘로 가는 피아노 소리’ 로써 하늘과 맞닿아 있다.
1849년 10월 30일 오전 11시 파리 마들렌느 교회에서 거행된 쇼팽의 장례식. 폴란드의 차르토리스키 왕자를 비롯해서 3천명의 조문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구대 위에 관이 올려지고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영전에 바쳤다. 이 연주는 나폴레옹의 유해가 환국(還國)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작곡가 생전에 그렇게도 흠모했던 모차르트의 ‘백조의 노래’가 역시 이승에서 고난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던 후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 조국 폴란드를 꿈에도 그리워했던 쇼팽. 페르 라 셰즈 공동묘지에 묻혀지는 관 위에 1830년 그가 바르샤바를 떠날 때 은컵에 담아 가져왔던 고향의 흙이 뿌려졌다. 역시 폴란드인이었던 67세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먼저 떠나는 자식의 육신 앞에 성호를 그었다.
“고이 잠드소서, 아름다운 영혼이여, 고귀한 예술가여! 그대로 인해 불멸은 시작되었노니...”
대문호 데오필 고티에는 이렇게 추도사를 읊었다.
쇼팽은 또한 피아노의 기능적인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오르간의 지속저음과도 같은 왼손의 분산화음을 개발함으로써 피아노의 완벽한 ‘노래’를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전통에 입각한 진보적인 화성과 색채감 있는 톤을 가진 조성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리스트와 바그너처럼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평균율’을 일과처럼 연주하며 모차르트를 그리워했던, 어린아이와 같이 지순한 마음을 가진 ‘참 인간’ 이었다.
“여러분 모자를 벗으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슈만이 쇼팽의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연주를 듣고 외친 유명한 말이다. 손가락을 다치기 전까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슈만이 가사가 있는 ‘리트’로 삶을 직접 노래했다면 쇼팽은 피아노로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유명한 작곡가의 많은 작품이 묻혀있는 것에 비해 쇼팽의 피아노 곡 거의 모두가 끊임없이 연주되는 것은 경이에 가까운 일이다.
쇼팽은 또한 평생을 바흐에 경도되어 살았다. 24곡의 전주곡 탄생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서 비롯되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무겁고 얼음같이 찬 빗방울이 쇼팽의 가슴위로 격류처럼 떨어졌다. 그날 밤 그의 영혼은 수도원의 기와지붕위로 단조롭게 떨어지는 빗방울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다시 그것을 상상력과 멜로디로써 그의 가슴속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물로 번역해 놓았다.”
(조르주 상드 ‘나의 생애’ 중에서, 1838년-39년 사이의 겨울)
상드는 비 내리는 혹독한 추위가 몰아쳤던 야간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창백한 얼굴에 눈은 커다랗게 뜨고 머리카락은 거의 곧추서 있는 상태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쇼팽을 발견했다. 아득한 꿈의 날개에 실려 어딘가 다른 곳에 끌려가 있는 듯한 그에게서 ‘빗방울’ 전주곡(D♭장조, Op.28-15)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838년 11월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손에 이끌려 마요르카의 발레아르 군도로 도피를 하게 된다. 이때 쇼팽의 두 손에 들려진 유일한 악보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었다. 종려나무와 올리브, 오렌지 나무와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된 쇼팽은 처음엔 즐거워했으나 3주간의 낙원생활이 끝나고 두 달간의 겨울비가 시작되자 추위와 함께 그는 심한 감기에 걸리게 되었다. 쇼팽의 병은 집주인 고메즈가 쫓아낼 구실을 제공해주었고 이들은 결국 1835년의 혁명으로 발데모자의 산마을로 해산된 수도승으로 인해 황폐화된 카르투지오 수도원(Carthusian monastery) 암자로 거처를 옮겼다. 열악한 수도원의 환경과 매일같이 쏟아지는 폭우와 추위는 쇼팽의 몸과 마음을 더욱 공황 상태로 몰아갔다. 겨울은 유난히 춥고 거칠었다.
“자넨 암벽과 바다 사이, 흉물스러운 거대한 수도원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있을테지. 창들은 파리의 마차 문보다 훨씬 크다네. 책상 위엔 바흐와 나의 노트가 있지. 침묵...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한마디로 나는 정말 이상한 장소에서 자네에게 편지를 쓰고 있네.”
1838년 12월 28일자로 폰타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쇼팽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최악의 여건 속에서 불후의 걸작인 24개의 전주곡이 잉태되었다. 쇼팽은 미완성인 ‘프렐류드’를 소리나게 하기 위해 낡을 데로 낡은 마요르카의 피아니노(pianino)를 빌렸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바흐의 ‘평균율’에 경의를 표하면서 역경 속에서 눈부시도록 슬픈 빛을 발하는 소품들을 하나하나 조각했던 것이다.
육체도 영혼도 ‘마조비아’ 인이었던 폴란드 사람 쇼팽. 그의 음악의 뿌리는 그래서 폴란드에 있었다. 느릅나무와 밤나무가 우거지고 실개천이 흐르는 시골, 젤라조바 졸라에서 태어난 쇼팽에게 농부들이 즐기는 폴란드 민요와 춤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마주르카, 폴로네즈 등의 민속춤곡은 그가 조국을 떠난 후에도 그의 음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협주곡 2곡, 3곡의 소나타를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소품(Characterpiece)을 쓰게 했는데 전주곡, 발라드, 녹턴, 폴로네즈, 왈츠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참다운 쇼팽 음악이 있다.
● 쇼팽 스페셜리스트
쇼팽을 가장 잘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누굴까? 지독한 우문(愚問)이다. 별처럼 많은 피아니스트가 명멸하고 지금도 전 세계의 콘서트홀에서 하루에 한 번은 쇼팽이 무대에 올려진다고 본다면 누구나 자신의 연주가 가장 ‘쇼팽적’이라고 몰아붙일 터. 필연적으로 개인 취향이 반영된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힌다. 대체로 고귀하고 시적이며 절제미를 표출하는 쇼팽 연주자로 가게 됨을.
슈만과 같은 해에 태어난 쇼팽은 어쩔 수 없이 동시대를 살아야 했다. 쇼팽의 ‘돈 지오반니 변주곡’을 듣고 1831년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세 짜이퉁’에 기고한 슈만의 첫 번째 리뷰는 이후 부인 클라라 슈만에게 자연스럽게 전염되었다.
암보로 공개연주회를 최초로 열었던 클라라는 19세기 전체를 관통하며 살았던 로맨티시즘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또한 독일에서 쇼팽을 처음으로 연주하며 쇼팽 연주자로도 이름을 날렸다. 결코 건반을 위에서 아래로 과도하게 내려치는 법이 없이 오밀조밀 주무르듯 내밀한 타건을 선호했던 클라라 슈만의 쇼팽은 ‘루바토’를 극히 경계하는 주법을 고수했다. 당시 대부분의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의 자기도취적인 자의적 템포 설정에 반기를 들었지만 정해진 박자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석으로 ‘쇼팽 알리기’에 일조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젊은 연주자들이 ‘오버 액션’으로 쇼팽을 망치는가! ‘보여주는 연주’가 아니라 ‘스스로 안으로 돌아 음미하는 연주’는 고결한 클라라의 성품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영국 출신의 모우라 림퍼니(1916~2005)는 클라라 슈만의 직계 제자다. 1938년 브뤼셀 국제 콩쿠르에서 동갑내기 에밀 길렐스에 이어 2위를 했던 거장 중의 거장이었다. 오로지 ‘톤 칼라(Tone Color)’로 대변되는 음색 만들기야말로 클라라 피아니즘의 정수였으니 림퍼니의 쇼팽 또한 ‘루바토’를 무시해 인습에 길들여진 청중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음반 속에 비쳐진 클라라 슈만의 숨결은 기어이 신기루를 품는다. 고상한 아름다움과 시적 표현은 ‘클라라 학파’의 철학과도 같은 것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가운데 림퍼니와 닮아있는 여류 연주자가 있으니 남미의 철철 넘치는 열정으로 가득한 마르타 아르헤리치다. 1965년 쇼팽 콩쿠르를 석권한 그녀의 쇼팽은 기름기가 배제된 담백한 기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터질 듯 한 리듬감과 에너지는 덤으로 받은 축복이다. 피아노 소나타 2번의 ‘장송행진곡’에서 아르헤르치는 당당한 진군보다는 오히려 흐느끼며 홀로 서 있다. 1974년 뮌헨 헤르쿨레스잘에서 녹음된 젊은 날 아르헤리치의 숨결은 천금의 무게감을 싣고 있다. 무작정 내달리는 천박한 야생마와는 차원이 다르다. 폴란드 춤곡 ‘마주르카’ A플랫장조에서 아르헤리치의 음악은 귀엽다 못해 앙증맞다. 하지만 치솟아 올라가는 기백은 역시 곳곳에서 번득인다. 무대에서 실연으로 보는 아르헤리치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건반과 속삭이듯 대화하는 그녀의 쇼팽이 겸손한 이유다.
자크 티보가 ‘진정한 음악의 여신’이라고 극찬했던 요우라 귈러(1895~1980)는 파리 음악원 시절 클라라 하스킬마저 2인자로 두며 승승장구했던 천재 중의 천재였다. 자신보다 24세나 어린 꼬마 지네트 느뵈에게 바이올린을 배울 만큼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유태인으로 2차 대전을 겪으며 극심한 굶주림과 피폐에 빠졌다. 그리고 71세인 1961년 다시 무대로 나온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1975년 80세의 나이로 마지막 음반을 녹음하는데 여기에 쇼팽의 연습곡 F단조와 발라드 4번이 수록되어 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해탈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피안의 언덕이 귈러의 쇼팽에 담겨 있다. 발라드 4번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어느 누가 이렇게 쇼팽을 다룰 수 있는가? 귈러의 연주를 듣고 ‘억누를 수 없는 환희의 세계’를 맛보았다는 아르헤리치의 고백이 가슴으로 절절히 저며 온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알프레드 코르토 이래 쇼팽은 남성 피아니스트에게는 교과서와도 같은 필수과목이었다. 1927년 제1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레프 오보린 이후 이 경연을 거쳐간 피아니스트는 모두 쇼팽 스페셜리스트였다. 벨라 다비도비치, 아담 하라세비치, 마우리치오 폴리니, 게릭 올슨, 크리스티안 짐머만, 스타니슬라프 부닌, 윤디 리 등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거장들이 즐비하다. 콩쿠르 우승보다 더 이름값을 하는 이보 포고렐리치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또한 비켜갈 수 없다. 여기에 한국인 형제 임동민, 임동혁까지 가세해 가히 점입가경을 이룬다.
당 타이손은 1980년 아시아인 최초로 바르샤바를 접수했다. 공산 정권 치하에서 처절한 노력으로 일구어낸 그의 업적은 ‘녹턴’에서 오히려 담담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열대의 밤이 먹먹하게 울려온다. 2001년 우승한 윤디 리의 연주는 같은 중국인인 랑 랑의 그것과는 다르다. 결코 과시하지 않는 미덕과 부드러움이 쇼팽의 정수에 근접해 있다. 2005년 짐머만 이후 30년 만에 폴란드인으로 우승한 라파우 블레하츠는 향후 행보가 더 궁금하다.
198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스타니슬라프 부닌.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3대 피아노 스쿨의 지존 격이었던 겐리히 네이가우스의 손자였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섬세함과 코스모폴리탄적인 천재는 쇼팽 연주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때로 내한 공연에서 감정 과잉으로 인해 지나친 루바토로 인해 역겨운 경우도 있었으되, 1987년 라이센스로 발매된 쇼팽 콩쿠르 우승자 기념음악회 실황 LP음반을 턴테이블에 걸었을 때 받은 감동은 일생일대의 대경험이었다.
어디 이뿐이랴!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20세기 최고의 쇼팽 전문가였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다름 아니다. 가장 규범적인 쇼팽이 이 폴란드 거장의 손에서 다채롭게 흐른다. 95년의 긴 생애는 쇼팽을 위한 여정이었다.
상송 프랑수아(1924~1970)는 19세기 감정의 격랑시대에 태어났어야 할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가슴은 얇은 유리잔처럼 깨지기 쉬운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돈과 명예, 물질적 풍요 따윈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1940년 제1회 롱-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프랑수아의 본령은 쇼팽이었다. 루이 프레모가 지휘하는 몽테카를로 국립 교향악단과의 피아노 협주곡 녹음은 확고한 자기표현과 악보에 대한 완벽한 해석으로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 특히 피아니시모의 절묘함은 그대로 꿈으로 화한다.
마주르카 제23번 Op.33-2를 들어보라. 어린아이의 심성으로 널뛰는 프랑수아의 피아니즘 앞에서 그 누구도 거짓을 논할 수 없으리라. 그의 마주르카 전집은 반드시 소장해야할 필연이다. 디누 리파티의 브장송 페스티벌 실황음반은 과거 LP시부터 애호가들의 표적이었다. 생의 마지막을 전소시키며 끝내 최후의 무대가 되었던 그 연주는 연습곡이 이토록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명연으로 찬사 받는다. 과거 거장들의 연주를 귀담아 들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쇼팽은 쇼팽다워야 한다. 가장 우아하고 가장 고결한 품성이 스며들지 않고, 자신만을 드러내는 연주는 이미 쇼팽이 아니다. 자신이 죽고 쇼팽이 살아야 명연주가 되는 것이다. 이는 최근 젊은 연주자들 사이에 번지는 오만함과 과시에 대한 경고이자 ‘참 음악’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글/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