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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자료실]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과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해설

클라라하우스
2016-03-26 02:36 16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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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E단조, Op.95 <신세계로부터>

 

 

나의 마음은 뮤즈의 신이

그에게 은총을 내린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H. 잘루스의 시 드보르자크에 그려진 체코 음악의 아버지안토닌 드보르자크. 그는 스메타나의 뒤를 이어 체코 음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또한 스메타나, 야나체크와 함께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민족주의적인 어법과 교향악적 전통을 가장 잘 결합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다른 관현악 작품과 합창음악, 오페라 그리고 실내악 분야에서도 평생을 두고 조국 체코의 마음을 투영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예술의 도시 프라하를 품고 있는 체코. 그 역사적인 아픔은 우리와 비견된다. 1620년 체코 귀족들이 하얀산의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패하고 이내 그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언어와 종교의 자유조차 강탈당한 억압적인 상황에 대항하는 체코인의 의지는 19세기 민족부흥운동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서 드보르자크는 태어났다. 184198일 프라하 북쪽의 작은 마을 넬라호제베스의 푸줏간 집 맏아들로 태어난 드보르자크.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천재를 보였지만 장남이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의해 푸줏간 일을 배워 음악사상 정식 정육업 면허를 딴 처음이자 마지막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음악에의 열정은 16세의 드보르자크를 혈혈단신 프라하로 이끌게 된다. 이때부터 1875년 교향곡 3번을 스메타나가 직접 청중 앞에서 지휘해주면서 성공을 거두기까지 오랜 세월을 드보르자크는 무명 작곡가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후 드보르자크는 체코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보헤미아의 브람스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2004년은 드보르자크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이 되던 해였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남서쪽으로 가다보면 케카로부 20번지에 드보르작 기념관이 있다. 필자가 200414일에 찾은 바로크 양식의 단정한 2층집은 이른 오전 시각임에도 방문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교향곡 외에 드보르작이 생애 전반에 걸쳐 천착한 분야가 실내악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만년의 걸작 현악 사중주 작품.105칸타빌레악장의 선율이 가슴으로 밀려들어온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신과 사랑과 조국, 오로지 이것만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준다라는 드보르작의 좌우명이다

신에 대한 그의 경외감은 레퀴엠과 오라토리오 성 루드밀라그리고 오르간 작품들로 구체화되었는데, 마침 다가오는 5프라하의 봄음악축제 때 공연될 성 루드밀라의 악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스메타나에게 발탁될 때까지 국립극장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하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드보르작의 비올라는 세월을 고스란히 증언하며 유리장 안에 세워져있다. “드보르작은 우리의 자랑이자 그의 음악은 바로 체코인의 정신입니다.” ‘드보르작의 해를 맞는 감회를 기념관 관리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무려 30배의 급료를 주는 파격적인 조건에 이끌려 1892년에 미국행을 택한 드보르자크는 광활한 신대륙에서 소중한 경험을 하는데, 그해 12월에 뉴욕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된 교향곡 9신세계에서는 미국음악계를 뒤흔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교향곡에서 들리는 미국적인 요소는 그러나 다분히 체코적이다. “그것은 모두가 체코 음악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작곡가의 조국사랑은 향수병에 시달리게 했으며 2년 만에 프라하로 돌아오게 한다.

조국은 돌아온 대작곡가를 영웅으로 대했다. 1904년 봄에는 제1회 체코 음악축제가 드보르자크를 중심으로 열렸고 전국에서 76개의 합창단이 모여들어 드보르자크의 교회음악을 불렀다. 수천명의 청중은 신세계교향곡이 끝나자 일제히 기립했다. 그러나 뇌일혈이 악화된 드보르자크는 불과 한달 후인 51일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장례 행렬에는 수만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유해는 몰다우 강이 프라하에 이르러 우러러보는 체코인의 마지막 안식처인 비셰흐라드 성의 묘지에 묻혔다.

 

 

나는 아메리카 흑인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위대하고 고귀한 음악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찾았습니다.”

 

드보르자크가 1893521일 뉴욕 해럴드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미국에서 그가 얼마나 흑인음악에 심취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아메리카의 원주인이었던 인디언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교향곡 9번은 바로 백인이 만든 신세계가 아니라 원래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던 흑인들의 애환이 담긴 신세계였다. 하지만 드보르자크 스스로도 1900년 베를린 초연 때 해설지에 인디언과 아메리카의 주제를 사용한 것을 삭제해달라고 했을 만큼 체코의 산물이자 전적으로 체코 음악이다

머나먼 타국에서 조국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향수가 곳곳에 흐르고 있는 보헤미안의 음악인 것이다. 인디언 민요와 흑인영가는 교묘하게 녹아들어 양념 역할을 담당하고 주 메뉴는 여전히 체코다. 18931215일 안톤 자이돌의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1악장 이 교향곡의 중요덕목인 당김음 리듬(syncopated rhythms)과 기존 7음계가 아닌 5음계를 사용하는 펜터토닉한 음계의 진행이 대단히 독특하다. 느린 첼로의 저음이 명상하듯이 23마디를 진행하다 느닷없이 알레그로 몰토의 주부로 뛰어든다. 팀파니가 가격한다. 서유럽 작곡가들에게는 볼 수 없는 드보르자크만의 작곡틀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노래하는 G단조의 2주제는 흑인영가 장미꽃을 파는 모세 할아버지의 가락이 찰랑댄다. 리드미컬하고 활기에 넘치는 악장은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

 

유명한 2악장 라르고’. 관악기의 은은한 서주에 이어 드디어 잉글리시 혼의 주제가 떠오른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멜랑콜리하고 아득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천국적인 멜로디다. 전설적인 인디언 영웅의 이름이자 헨리 롱펠로우의 서사시 하이아워서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드보르자크의 천재성이 그대로 돋보인다. 숲의 장례식은 음악으로 그려진다.

 

"Going Home, Going Home, I,m just going home; Quiet-like, some still day, I,m just going home..."

 

미국 시절 드보르자크의 제자였던 윌리엄 피셔는 1922년 이 라르고 악장에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다. 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 로 번역돼 널리 알려졌다. 가장 친근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악장이다.

 

또 체코의 흙냄새가 풍겨온다. 3악장 스케르초는 푸리안트와도 같은 독특한 현의 리듬감으로 충만하다.하이아워서에서 결혼식를 축하하는 댄스파티 장면이 연상된다. 목관을 적시적소에 배치하는 드보르자크의 능력은 실로 탁월하다. 중간부 트리오는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체코 시골마을의 정겨운 춤곡 같이 일렁이는 애수어린 선율이 으뜸이다. 여기저기에서 새들이 노래하고 물결이 일렁인다. 대비되는 두 번째 트리오도 여전히 소담스럽다. 이 스케르초 악장 하나만으로도 드보르자크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피날레 악장의 장대한 주제는 행진곡 풍으로 터져 나온다. 화끈하게 몰아붙이는 드보르자크 특유의 전합주가 악장 전편을 수놓고 있다. 곁들여져 등장하는 클라리넷의 2주제는 다시금 서정미를 풍긴다. 재현부 이후의 장대한 클라이맥스는 그저 마음껏 즐기면 된다. 그 어떤 작곡가도 모방할 수 없는 드보르자크만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되어 있는 걸작이다.

 

(연주시간 50) 2015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프로그램 노트 중에서

 

 

모데스트 무소륵스키(1839-1881)

전람회의 그림

 

 

슈베르트가 천국에 맞닿아 있는 선율미로 노래하다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과 너무도 일찍 작별을 고했다면, 러시아에서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음악어법으로 자신의 울분을 거침없이 내뱉다 비참하게 죽어간 무소륵스키가 있었다. 슈베르트에 대한 슬프디 슬픈 연민이 무소륵스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난 1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네프스키 수도원 묘역에 안장된 차이코프스키와 러시아 5인조의 묘지를 참배한 적이 있다. 영하 20, 눈물마저 얼어버릴 겨울 바람이 휘황히 부는 가운데 황망한 무소륵스키의 묘는 조화 하나 없이 고독히 서있었다. 생전의 아픔을 죽어서도 치유하지 못한 것일까? 바로 옆 차이코프스키의 동상 앞에 둘러선 관광객들이 바친 수많은 꽃다발에 비해 더욱 곤궁해 보였다.

 

음악사를 통틀어 무소륵스키만큼 회한으로 덧입혀진 삶을 살다간 작곡가가 또 있을까? 귀족 가문의 막내로 태어나 양지에서 살던 그는 지병인 간질이 발작하고 사랑하던 여인을 먼저 보내는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 42세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실에서 죽어갔다. 그가 남긴 63곡의 가곡은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이며 흐느끼고 있다. 베이스 아나톨리 사퓔린이 부르는 죽음의 노래와 춤'을 들어보라. 노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비연속적인 낮은 음성이 세상의 악을 저주한다.

 

이러한 음지의 작곡가가 남긴 피아노의 걸작이 바로 전람회의 그림'이다. 19세기 러시아 음악계의 가장 독창적인 피아노곡일 뿐만 아니라 기교적으로도 대단히 어렵다. 당시 대부분의 러시아 작곡가들은 서구적인 전통 화성을 사용했으나 무소륵스키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터라 자신만의 작곡기법으로 혁명적인 음악언어를 창조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속박받지 않고 표준이 없었던 그에게서 대담하고 이상했지만, 옳은 화성이 나왔다는 것은 그의 음악의 근원이 러시아 민중의 노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1873년 친구였던 건축가 빅토르 하트만이 세상을 떠나자 무소륵스키는 충격에 휩싸였다. 다음해 1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미술학교에 개최된 하트만의 유작전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일관성 있는 일련의 모음곡을 작곡하게 된다. 하트만의 작품과 이전에 간직하고 있던 다른 인상을 같이 조화시켜 그림과 연관된 10곡의 소품과 5개의 프롬나드'가 기막힌 배열을 이루며 진행된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의 독창성이 곳곳에 녹아있는 리얼리즘의 전형이다.프롬나드'에 감겨있는 러시아 민요의 색채, ‘옛 성'의 오르겔풍크트 위에 얹혀지는 음유시인의 노래, ‘병아리의 발레'에서 유쾌하게 펼쳐지는 트릴은 오히려 역설적일만큼 냉소로 가득하다. ‘카타콤베'의 음산함은 구원의 메시지를 설파하며 마지막 키예프의 대문'에서 들려오는 코랄 선율은 장엄한 옥타브 연타로 드높아진다.

 

고도의 기교뿐 아니라 러시아 민중의 품속으로 들어가야 제대로 된 연주가 나올 수 있다. 라벨을 위시해 여러 작곡가의 관현악 편곡보다는 피아노 원곡이 제격이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정서와 그것을 탈피하고자 하는 희망에 대한 욕구가 공존하는 음악'이 러시아 음악임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연주시간 30) 2002년 미하일 페투호프 내한공연 프로그램 노트 중에서

 

 

/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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