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자료실] (2월 28일) 쿠르트 마주어 특집갈라, 자크 루시에 트리오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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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오후3시
시네오페라는 서로 다른, 하지만 같은...
라이프치히에서의 실황공연으로 함께 합니다.
바로 지난해 12월 19일 세상을 떠난
불세출의 거장 쿠르트 마주어의
2007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실황공연과
바흐 재즈 편곡의 독보적인 존재인 자크 루시에 트리오의
2004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실황공연 입니다.
바흐의 본거지 라이프치히에서 펼쳐지는
클래식과 재즈의 향연!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반트하우스의 17대 카펠마이스터인 쿠르트 마주어!
그의 삶은 진정한 음악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번 영상은
2007년 자신이 27년 동안이나 지휘했던
바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80세 생일을 맞아 갈라콘서트로 꾸민 실황입니다.
아래
월간객석 2월호에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가 기고한 마주어 특집기사 붙입니다.
그리고
1959년 24살의 프랑스 청년 자크 루시에가 평생을 바흐에 바치겠노라
창단한 자크 루시에 트리오!
그의 나이 70세인 2004년
바흐의 무덤이 있고
바흐가 27년 동안이나 칸토르로 일했던
바흐성지인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재즈로 바흐를 연주하는 귀중한 영상물입니다.
절로 어깨춤을 들썩이게 하는 기막힌 바흐와
라벨의 '볼레로'까지
휴일 오후를 윽흥으로 몰아갈
2개의 명연주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고인의 부인과 아들 켄 그리고 며느리가 함께 보입니다.
독일의 유명 배우이자 작가인 하랄트 쉬미트가 출연해
거쉰을 부르고 진행을 함께 합니다.
오로지 바흐에 모든 것을 바친 거장에게 절로 고개숙여집니다.
24살에서 어느덧 고희가 된 자크 루시에의 모습입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카덴차를 드럼으로 연주할 때 환상 그 자체입니다.
라히프치히 바흐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자크 루시에 트리오
바흐의 고향에서 인정받은...
젊은 시절의 자크 루시에
주옥같은 곡들로 모았습니다.
월간 객석 2016년 2월호
쿠르트 마주어를 추억하며
글/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기도는 음악이었고, 그의 음악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음악의 힘에서 나오는 그의 신념과 업적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월 14일 오전 11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독일 MDR 방송국이 전국에 생중계를 하는 가운데 쿠르트 마주어의 장례예배가 열렸다. 지난해 12월 19일 미국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서 파킨슨씨 병 후유증으로 88년의 생을 마감한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 그가 무려 26년 동안 지휘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이 바흐의 칸타타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연주했다. 그리고 선배 지휘자 멘델스존의 장례식 때와 마찬가지로 바흐의 ‘B단조 미사’ 가운데 ‘도나 노비스 파쳄’이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부인 토모코와 가족을 비롯해 현 카펠마이스터 리카르도 샤이, 게반트하우스 행정디렉터 안드레아스 슐츠를 비롯해,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 테너 페터 슈라이어 등 1500명의 추모객들이 교회 안을 가득 채웠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마주어의 유해는 라이프치히 남부 공원묘지로 향했다. 2차 대전 후 만신창이가 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재건했던 지휘자 프란츠 콘비츠니가 묻혀 있는 바로 그곳이다.
쿠르트 마주어! 그는 한 사람의 지휘자 이전에 살아 있는 양심으로 정의를 구현했던 위대한 인간이었다. 예술을 권력과 돈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몇 몇 지휘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며 ‘절대선’을 추구했던, 마치 베토벤의 이상과 합일했던 지성인이었다. 독일의 정신적인 수도이자 ‘작은 파리’로 이름을 날렸던 라이프치히에서 마주어의 꿈은 이루어졌다. 1479년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궁정과 교회에 소속된 오케스트라가 전부였던 1743년, 16명의 기업인들이 16명의 악사를 후원하면서 시작된 이 기막힌 세계 최초의 민간 교향악단은 멘델스존, 발터, 푸르트벵글러 등 전설적인 거장들이 거쳐 갔고 마침내 마주어에게 17대 카펠마이스터의 중책이 맡겨졌다.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공산주의에 항의해 사임했던 바츨라프 노이만 이후 2년 동안 휘청대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1970년에 맡아 1996년까지 이끌면서 세계 정상의 자리에 다시 올려놓은 음악적인 성과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는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를 설득해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게반트하우스를 37년 만에 재건했다. 6,638개의 파이프가 장착된 슈케 파이프 오르간이 위용을 자랑하는 새로운 게반트하우스는 세계 최고의 음향을 자랑한다.
이 뿐 만 아니었다. 자신의 직속 선배인 5대 카펠마이스터 멘델스존을 다시 부활시켰다. 멘델스존 당시 유럽 최고의 악단은 당연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였다. 마주어는 바그너와 나치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졌던 멘델스존의 작품을 온전히 복원했다. 취임하자마자 1971년부터 2년 동안 멘델스존의 교향곡 전곡 녹음을 감행했고 이 음반은 지금까지도 애호가들 사이에 교과서적인 절대명반으로 손꼽힌다. 또한 1936년 11월 9일 나치가 무너뜨린 게반트하우스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던 멘델스존의 동상을 1993년 3월 10일 다시 세웠다. 3년 뒤인 1997년 10월 멘델스존이 사후 150년이 되던 해에 마주어가 설립한 국제 멘델스존 재단은 라이프치히 골드슈미트거리 12번지에 마침내 기념관을 열었다. 그 건물은 멘델스존 가족이 라이프치히에서 살던 집이었다. 마주어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유태인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룻밤 뿐 아니라 100 년 후에도 그럴 겁니다. 철저하게 훼손되었던 ‘유태인 멘델스존’을 기억하며 다시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을 세웠습니다. 멘델스존의 생활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세상을 떠났던 ‘멘델스존 기념관’은 완벽히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건 바로 희망입니다. 그의 유산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을 희망이요, 라이프치히가 다시 한 번 예술가들을 보호할 수 있는 희망입니다.”
마주어의 또 다른 업적은 바로 ‘행동하는 음악인’의 대표적인 표상이라는 점이다. 1989년 8월 1만 명이 넘는 동독인들이 서방으로 탈출했다. 공산 정권 붕괴의 시작점은 라이프치히였다. 9월 4일부터 재개된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 이후의 ‘월요시위’는 수만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의 쫓기던 시위대 수백명을 게반트하우스 안으로 피신시켜주기도 했던 마주어는 7만명이 모였던 10월 9일 시위 전에 공산당 간부 3명과 신학자, 개그맨 1명과 자신의 집에서 ‘라이프니츠의 6인’ 모임을 열어 직접 평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 결과 당국은 무력진압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실로 정치가가 하지 못한 엄청난 일은 음악가가 해낸 것이다. 당시 라이프치히 인구가 50만이었는데 10월 23일 시위에는 무려 32만 명이 참여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독일 통일의 주역은 마주어를 비롯한 라이프치히 시민이었던 셈이다.
마주어는 1990년 10월 2일 독일 통일 선포식 하루 전날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게반트하우스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연주했다. 통일 독일의 주역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1989년 크리스마스에 레너드 번스타인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곡으로 무대에 올렸던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콘서트를 ‘미국 스타일의 쇼’라고 비판했던 마주어는 불꽃같은 음악혼을 이 역사적인 공연에 쏟아 넣었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1년 구 동독 국민들은 마주어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그는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 계약서에 사인함으로써 정치와 선을 그었다. 주빈 메타가 이후 '100명이 떠드는 소리 같다'는 비아냥을 들으며 앙상블이 깨진 뉴욕필은 마주어 덕분에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주어는 당시 독일 땅이었지만 1927년 지금은 폴란드 남실레지아 지방에 위치한 브리크에서 태어났다. 전기제품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닮아 어린 마주어는 엔지니어적인 감각도 탁월했다. 열 살 때부터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우던 그는 1942년부터 브로추아프 음악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전도유망했던 16세의 마주어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접고 지휘로 방향을 튼다. 또한 이 일은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마주어는 할레 국립극장 지휘자로 부임했다. 이어 에어푸르트 시립극장, 라이프치히 오퍼, 드레스텐 필하모니, 베를린 코미쉐오퍼를 지휘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1972년부터 1997년까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전성시대를 일구었다. 뉴욕 필하모닉은 1991년부터 2002년까지, 런던 필하모닉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파리 국립 교향악단은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지휘하며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로 일정을 보냈다. 하지만 마주어 음악의 본향은 언제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였다.
마주어는 그의 삶만큼이나 사랑도 파란만장했다. 불과 16세에 댄스 그룹에서 만난 브리기테 슈튀체와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녀 또한 마주어와 같은 남실레지아 출신이었다. 1948년에 재회를 한 커플은 마주어가 할레 국립극장의 카펠마이스터 시절 결혼했다. 둘 사이에 아들 미카엘과 마티아스, 딸 안젤리카가 태어났다.
베를린 코미쉐오퍼 지휘자 시절, 마주어는 가정불화에 시달리다 발레리나 이름가르트 카울과 사랑에 빠졌다. 1966년 이름가르트는 딸 카롤린을 낳았고 마주어는 브리기테와 이혼했다. 1971년 이름가르트와 늦깎이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듬해 엄청난 비극이 찾아왔다. 1972년 4월 26일 마주어가 몰던 벤츠 승용차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냈다. 부인과 동승자 2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마주어도 중상을 입었다. 두 달 뒤 아픈 몸을 이끌고 부인를 위한 추모음악회에서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지휘했을 만큼 아끼고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1974년 마주어는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토모코 사쿠라이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이듬해 7월 세 번 째 결혼식을 올린 마주어는 1977년 토모코와의 사이에 아들 켄-데이비드를 낳았고 켄은 현재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8월 23일 저녁 스웨덴 트롤헤탄과 베네르스보리에서 열린 오로라 클래식 페스티벌 페막 연주회는 마주어의 이승에서의 고별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무대로 등장하는 노거장의 모습만으로도 이미 숭고한 음악의 넋이 꿈틀댔다. 파킨슨씨 병으로 투병 중인 마주어의 오른손은 몹시 불편해보였다. 그러나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명연으로 타올랐다. 최소한의 몸짓으로 최대한의 음악을 이끌어낸 것이다. 마주어가 생전에 전 세계에서 받았던 80개가 넘는 상보다 이 짧은 음악 하나가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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