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준의 음악이야기 11월 일정과 마리아 칼라스 강의자료 > 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공지

[공지사항]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11월 일정과 마리아 칼라스 강의자료

클라라하우스
2016-11-07 09:12 195 0

본문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11월 일정과 강의자료입니다.

<월간 피아노음악>에 유혁준 선생님이 연재하는 글과 동일합니다.

 

늦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브람스,

그리고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위대한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의 삶과 음악세계를 살펴봅니다.

 

11월 7일(클라라하우스) 9일(마리아칼라스홀)

* 클라라를 향한 연서! 브람스 ⓷
- 교향곡 1번의 탄생​​ 
 
11월 14일(클라라하우스) 16일(마리아칼라스홀)
* 거장의 숨결, 마리아 칼라스 ⓵
- 탄생과 성장, 데뷔
 
11월 21일(클라라하우스) 23일(마리아칼라스홀)
* 거장의 숨결, 마리아 칼라스 ⓶
- 충직한 남편 매네기니와 사랑의 불을 지핀 오나시스
 
11월 28일(클라라하우스) 30일(마리아칼라스홀)
* 클라라를 향한 연서! 브람스 ⓸
- 교향곡 2번과 독일 레퀴엠​​

 

* 브람스 교향곡 1번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를 넘어선 음악

 요하네스 브람스 (1833-1897) 교향곡 1C단조, Op.68

 

 

브람스는 기본적으로 피아니스트였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안으로 돌아가는실내악에 더 맞았다. 때문에 초창기에는 오케스트라 작품을 쓰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더구나 베토벤이라는 거인이 앞에 있는 이상 교향곡은 더욱 그에게 산고의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브람스는 첫 교향곡을 43세에야 세상을 내놓았다. 자기비판에 엄격했던 브람스는 위대한 선배 베토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굳은 결심으로 20년이 넘는 담금질을 거쳐 발표했다. 때문에 교향곡 1번은 베토벤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뚜렷이 했고 여러 점에서 베토벤과 공통점이 많다. 당시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는 베토벤의 교향곡 불멸의 9에 이어지는 걸작이란 뜻에서 10이라 말했으니, 이 곡의 위대성을 잘 보여준다. 이로 인해 교향곡 분야에서 수적으로는 4곡 밖에 남기지 않았으나 브람스는 베토벤 이후의 낭만파 음악에서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존경하는 스승 슈만의 만프레드서곡을 듣고 교향곡 창작의 불씨를 지핀 22세의 청년 브람스는 무려 20년이라는 세월동안 다듬고 또 다듬어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불혹의 나이에야 마지막 음표를 찍을 수 있었다. 단 한 개의 음표도 버릴 것이 없는 브람스의 교향곡 C단조는 우연히도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과 조성이 같다. 베토벤의 위대한 업적을 운명처럼 계승해야 했던 브람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

 

이 무렵 유럽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교향곡은 베토벤에서 끝났다!” 라고 외치며 세를 확장해간 바그너의 말처럼 당시 음악계는 표제적이고 묘사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베토벤이 당대에 유행했던 이탈리아 오페라와 왈츠 풍의 가벼운 음악들에 대항해서 자신을 산화시켜 인류의 유산으로 견고히 남은 9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던 것처럼, 브람스는 바그너파의 인기주의에 맞불을 놓아 허물어져 가는 교향곡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는 브루크너와 말러로 이어지는 교향악 중흥의 초석이자 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브람스는 베토벤과는 확연한 선을 그었다. 외향적이고 투쟁적인 베토벤의 교향곡과는 달리 브람스의 그것은 무겁게 가라앉은 북부 독일의 구름처럼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도의 철학적인 깊이가 함축되어 있다. 거기에 클라라에 대한 동경과 플라토닉한 사랑, 그래서 독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까지 합치돼 실타래처럼 얽힌 복잡성을 함축하고 있다.

1855년에 첫 삽을 뜬 교향곡 1번은 1악장을 1862년에 완성하고 다시 14년이 지나 18769월에 끝을 보았다. 그 해 114일 칼스루에 대공의 궁정극장에서 오토 데소프(Otto Dessoff)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악장은 팀파니의 무시무시한 타격이 동반되는 비극으로 돌입한다.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와도 같다. 반음계적인 진행은 그 느낌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서주일 뿐이다. ‘싸움닭같은 베토벤의 투쟁적인 면모에 브람스의 안으로 돌아가는심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3분여의 기나긴 서주가 지나가면 드디어 알레그로의 주제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을 필두로 비올라와 첼로가 노래하는 2주제의 아름다움은 놀라움 그 자체다. 이 장엄한 의식은 소나타 형식이라는 강력한 테두리 안에서 핵융합을 거듭하며 중첩된 함의(含意)를 계속해서 부르짖는다. 전개부에 나오는 코랄 힘을 내어라, 나의 약한 마음이여는 더욱 더 앞으로 진군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1악장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다.

 

이제 한숨 돌린다. 브람스 음악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음의 파도가 넘실댄다. 오보에의 사랑스러운 노래는 그대로 클라라 슈만에게 향하는 연가(戀歌)로 화한다. 오보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간부에서 우리의 넋을 달래주는 노래를 한 번 더 구슬프게 읊는다. 3부에 접어들면 독주 바이올린이 낭랑하게 주제를 다시 연주한다. 이제 신성한 경지에 도달한다. 이보다 더한 평화가 없고 이보다 더한 슬픔도 없다.

 

3악장은 오랜만에 긍정적이다. 고전주의의 스케르초와 미뉴에트를 버리고 브람스만의 전원 풍경을 그리고 있다. 피치카토로 움직이는 첼로와 혼을 끌어안고 클라리넷이 사랑스러운 선율로 율동한다. 하지만 클라리넷은 왠지 적적함을 감출 길 없다. 역시 브람스답다. 트리오는 그나마 밝고 익살스럽다. 교향곡 1번 전체 가운데 미소를 띨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드디어 4악장 승리의 노래가 시작된다. 예의 C단조로 회귀해 장중하고 치밀어 오르는 카타르시스가 돋보인다. 바이올린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갑자기 하강 곡선을 그린다. 그러더니 피치카토로 미쳐 날뛴다. 이건 겉보기에 묵묵한 브람스의 내재된 광기와도 같다. 드디어 안단테의 C장조로 들어가 혼이 1868년 클라라 슈만에게 바친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다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트롬본과 목관군의 릴레이는 바흐가 그렇게도 즐겨 썼던 코랄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린이 그 유명한 주제가 현악기로 나타난다. 실로 벅찬 순간이다. ‘고난을 뚫고 환희에로로 대변되는 베토벤의 이상에 자신의 가치관을 가감 없이 투사해 드디어 거인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본다. ‘아니마토2주제와 어울리며 환희는 계속 고조되어 간다. 재현부에서는 목관이 주제를 되받는데 더욱 세련되어 있다. 코다에서는 주제를 카논으로 바꿔 연주하고 마침내 승리의 노래(Triumphlied)’는 장대한 막을 내린다.

 

* 마리아칼라스

오페라 역사의 ‘B.C.’‘A.D.’‘Before Callas’‘After the Diva’

마리아 칼라스와 남편 메네기니

 

 

때로 우리는 음악을 각양각색의 예술 장르 중의 하나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의 삶과 사회에 맥락을 맞춰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능란한 성악가의 기교보다는 그 가수의 삶과 생활과 인생관을 먼저 이해하고 선율보다는 가사와 곡의 배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리아 칼라스에 열광한다. 그녀가 영면한 지 사망한 지 40년이 되어가지만 언론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기사화하여 전 세계를 칼라스 열풍으로 식을 줄 모르게 하고 있다. 특히 내년은 40주기를 맞아 더욱 떠들썩하게 음악 팬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칼라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사실 칼라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세계의 거의 모든 신문과 대중 매체에서는 탐욕스럽게 그녀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음악적인 것 뿐 아니라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칼라스에 관련된 것이면 그것이 진실이든 허위이든 무엇이든지 대중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그들의 저속한 상업성과 맞물려서 채워 주었다. 심지어 칼라스가 노래하는 아리아 한 곡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그랬다. 예술보다는 생활과 주변 인물에 대한 소문에 더 신경을 썼고 무엇이든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대중 앞에서 칼라스는 새장 속에 갇힌 새였던 것이다.

 

특히 인기의 절정에 있었던 195657년 시즌에는 칼라스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거리가 되었을 만큼 자유가 없었고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기 전에는 말과 행동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대중들은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것조차 용납하려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서 1959년까지 죠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896~1981)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오나시스의 품으로 갔을 때 이러한 언론의 행각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28년의 나이 차가 나는 메네기니, 칼라스 부부를 흔히 보아 온 돈 많은 졸부와 철없는 여인의 장난질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메네기니의 헌신적인 칼라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칼라스의 메네기니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면 제멋대로 내리는 판단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적어도 1982년 메네기니가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를 출간하기 전까지 칼라스에 대한 자서전과 책들은 무대 위의 그녀를 단 한 번 보았거나 단 몇 분 이야기해 보고 예술에 대한 결론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글이었다. 진실로 음악을 이해하거나 직접 알고 지낸 것이 아니라 칼라스를 거만하고 변덕스러우며 전제적인 디바로 몰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메네기니를 통해 칼라스가 인간적인 감성을 가지고 신체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광적으로 아기를 갖고 싶어 했던 평범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수많은 오페라의 주인공을 그토록 충실히 재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칼라스는 부부애와 가정의 행복에 대한 청교도적인 결벽성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메네기니와 함께 한 12년 세월의 최대 관심사는 두 사람 사이의 행복과 사랑이었던 것이다.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음색, 엄격하고 정밀하게 조탁된 음악성, 극적인 힘을 발휘하는 감정의 격렬함, 천재적 영감의 번득임 등 온갖 찬사와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해도 부족함 없는 칼라스는 단일 연주자로는 20세기 최고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모노로 녹음된 음반은 전혀 빛을 잃지 않고 있다. 1962년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하던 때에 함부르크에서 가진 칼라스의 역사적인 공연 실황이 있다. 지휘자와 손을 맞잡고 등장한 칼라스의 모습은 오페라 무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강렬하게 꿰뚫어보는 눈빛, 아직 노래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극장 안은 숨죽이는 청중과 가수는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첫 음성이 나오고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그녀는 슬픈 표정이었다. 삶을 달관한 듯한, 아득히 먼 천국을 동경하는 눈빛이 가슴을 여지없이 파고든다. 카르멘은 관능적인 여인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해 무서운 저주를 온몸으로 퍼붓는 연기는 이미 노래의 차원을 넘어선 절규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불우하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낸 칼라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머니조차 그녀에게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개발되기 전에는 평범한 것이었다. 실로 눈물겨운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만의 강렬한 발성법을 터득할 수 있었고 2차 대전 후 뉴욕으로 가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에게 오디션을 받았으나 결과는 ‘No’였다. 칼라스는 무료로라도 좋으니 '토스카' 출연을 간청했지만 극장에서 뚱뚱하고 평범한 가수에게 타이틀을 맡길 이유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칼라스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극장에서 폰키엘리의 라 죠콘다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도 주최 측에서는 칼라스의 다급한 처지를 이용해 삼류 가수 정도의 형편없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칼라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나마 빌린 여행 경비로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베로나에서 공연은 훌륭했지만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칼라스는 이후 공연 제의를 전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칼라스에게 도움 주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그녀가 유명해진 다음의 일이었고 그것도 돈을 벌어 보려는 목적이었다. 오직 한 사람, 베로나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칼라스를 알아보고 도와주겠다고 나선 메네기니만이 평생의 반려자요 조력자였다.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비만한 체구 때문에 발목이 붓고 온갖 피부병에 시달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무명 가수를 아무 대가없이 품에 안은 셈이다. 칼라스는 행운아였다. 자신의 전부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었던 메네기니를 만나지 않았던들 칼라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메네기니는 진정 칼라스를 사랑했다.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언론의 악의에 찬 왜곡된 표현 때문이었다. 심지어 노래에 대해 극찬을 하면서도 정작 칼라스의 예술을 탄생하게 한 장본인인 메네기니와 그들 부부에 대한 부분은 서슴없이 날조된 펜의 칼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메네기니는 나는 마리아를 위해 살았고, 나의 삶의 대부분을 그녀를 위해 바쳤으며 한결같이 사랑했다.” 고 고백한다. 칼라스 또한 메네기니가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었다. 1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남편의 생일 아침이면 언제나 편지와 선물을 준비했고 공연 때문에 떨어져 있을 때는 꼭 긴 사랑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우리가 항상 이처럼 만족할 수 있도록 신께 기도해요. 당신의 충실한 아내 마리아...”

 

 

누가 칼라스를 오만하고 변덕스런 프리마 돈나의 대명사라 하겠는가. 그녀는 가정에서 상냥한 아내였으며 무대에서는 철저한 프로 예술가였다. 하지만 칼라스는 가수들을 흥행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며 갑질이 만연했던 당시 극장주들에게 당당히 맞섰던 유일한 가수였다. 이 때문에 언론은 칼라스의 공격적인 성향을 과대 포장했다. 수년간의 친분도 가차 없이 버리고 쫓아내는 횡포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오페라계에서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함께 반기를 들고 오히려 악명 높은 라스칼라 극장주 기링겔리를 발 앞에 무릎 꿇게 했다. 또한 칼라스를 철저하게 무시했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이 제 발로 찾아와 출연해 달라고 애원하게 했던 것이다.

 

칼라스는 너무도 연약한 여인이었다. 한시도 남편 없이는 안정을 취할 수 없었고 말년에도 그녀의 운전수에게 휴일에도 같이 있게 하려고 온갖 꾀를 다 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에게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목소리를 잃고 나중에는 자신을 잃었다고 후회했다. 그녀는 죽기 며칠 전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얼마나 메네기니를 그리워하는지 모릅니다. 평생 많은 죄도 저질렀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칼라스는 197791654세로 타계했다. 과다한 수면제 복용으로 인한 심장 마비가 공식적인 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의문투성이다. 검시조차 하지 않고 3일 만에 화장했다. 모차르트가 공동묘지에 위치도 알 수 없게 매장되었듯이 너무도 허무한 죽음과 장례식이었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라 죠콘다’ 4막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자살’. 칼라스의 이탈리아 무대 첫 오페라가 이것이었고 죽음을 앞두고 적어둔 다섯 줄 글귀도 이 아리아의 도입부였다.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해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치아에서 루치아는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피를 토해내는 격정과 분노 그리고 옛 시절에서의 회상은 섬뜩한 전율과 함께 불의한 세상에 대한 경고의 몸짓과도 같다.

 

 

/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