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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자료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음악이야기 3월 자료)

클라라하우스
2017-03-14 08:22 17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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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준의 음악이야기 3월 강의자료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비창’>

 

 

차이콥스키 기념관과 네프스키 수도원 예술가 묘역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나의 괴로움을 알 수 있다

홀로, 모든 기쁨에서 떨어져

먼 창공을 바라보노라

얼마나 내가 고민했던가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 나를 사랑하고 아는 이들

먼 곳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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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20도의 혹한이 몰아치던 2001110일 오후 모스크바 근교 클린시 어귀에 있는 차이콥스키 기념관. 교통체증이 심한 모스크바를 벗어나서 눈 내린 레닌그라드 대로를 타고 2시간을 더 왔다. 단층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스크바와는 달리 자그마한 집들이 그림처럼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태양은 사라진지 오래. 회색빛에 휩싸인 하늘과 땅, 뾰족 지붕을 한 집들,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벌거벗은 자작나무숲이 끝나면 진회색 전나무가 나타나는, 차이콥스키가 그토록 사랑했던 러시아의 대자연에 묻힌 생의 마지막 9년을 보냈던 하늘색 2층 목조 가옥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가에서, 핀란드만의 황혼녘에서도 귓가를 맴돌던 차이콥스키의 로망스 다만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의 선율이 또다시 스쳐갔다. 러시아 음악의 궁극은 인간의 이러한 애타는 그리움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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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는 쇠잔해진 몸과 마음을 자연 속에서 회복시켰는데, 고독과 정적만이 흘렀던 이 집이야말로 그의 창작의 원천이었습니다.”

마침 휴관하는 날이라 몸소 안내를 맡아준 박물관장 또한 기품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쇠잔해진 몸을 이끌고 이 곳에서 최후의 불꽃을 비창이라는 이름으로 쏘아 올렸다. 회한으로 점철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그는 아다지오 라멘토소에 투영하여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하는 영혼의 넋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자작나무 숲에서 노래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중간에 고뇌하는 차이콥스키의 사진이 육중하게 걸려있고 드디어 차이콥스키의 작업실과 침실이 나타났다. 그의 유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방안. 시간을 거슬러 19세기 후반으로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곡실의 책상 앞에는 교향곡 6비창의 초고가 놓여 있고 격자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책상에 앉아 마지막 백조의 노래를 작곡했다 생각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189310월 초,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6번의 지휘를 위해 이 집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내 차이콥스키의 기념상2.JPG
기념관 내 차이코프스키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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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겨울은 특히 인간에게 극한의 자연환경을 경험하게 한다. 오전 10시가 지나야 날은 밝아지고 오후 4시면 이내 어두워진다. 외부에 노출되는 것은 얼굴 뿐으로 내쉬는 숨은 이내 얼어붙고 눈썹은 하얗게 된다. 페테르부르크 거리의 연말은 의외로 차분했다. 율리우스력을 쓰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 17일을 앞두고 욜카라 불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운반하는 짐꾼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모피외투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냉혹한 자연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이미 받아들이고 순응해야하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빙판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천년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네프스키 대로의 남쪽 끝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 내 예술가 묘역의 겨울은 추위로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해 달라붙은 눈꽃이 만개한 앙상한 나무들과 간혹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묘비 앞의 동상은 근엄한 얼굴로 낯선 이방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광대한 대지와 역사의 일치를 그렸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삶의 무게만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근대 도시의 병적인 아픔을 묘사한 작가였다. 누구보다도 슬라브 지상주의자였고 정교회 신앙을 믿으며 러시아를 사랑하고 페테르부르크를 사랑했던 도스토예프스키. 그래서 그의 묘를 거치지 않고서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은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묘를 지나자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는 글린카와 러시아 5인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설립자 안톤 루빈슈타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의 묘지가 여전히 많은 꽃다발을 앞에 둔 채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여름에 다녀갔을 때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간데없고 주위는 온통 흰색뿐인데 휘황한 바람만이 가끔 불어올 뿐 마음은 무거웠다. 또다시 그리움이 스쳤다. ‘비창의 선율이 온 몸을 휘감아왔다.

십자가를 든 수호천사가 흉상을 지키고 있는 차이콥스키의 묘 앞에는 유난히 많은 꽃송이와 견학 온 학생들이 둘러서 있었다. 교향곡 비창을 손수 초연하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영면한 그의 음악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 예술이라는 책임 아래 그토록 고달픈 삶을 살다간 차이콥스키의 무덤 앞에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흙이 되었을 그의 시신이 세월을 거스르고 지금 앞에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비록 생전의 삶은 힘들었지만 당신이 남긴 음악은 지금, 당신은 몰랐던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 중의 하나입니다. 되뇌는 머리위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적막함을 더해주었다.

 

 

편히 쉬소서. 2001년 겨울 이후 필자가 러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자취가 남아 있는 클린의 기념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묘지가 된 것은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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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의 묘지

 

 

 

아프도록 슬픈 백조의 노래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1893) 교향곡 제6비창’ B단조, Op.74

 

 

1890년 차이콥스키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나제주다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일방적인 단교를 당한 뒤 치유 불가능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열렬한 후원자로 플라토닉한 사랑을 이어오던 차이콥스키는 마음속에 슬픔만을 남긴 채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과 염원을 마지막 교향곡에 쏟아 붓기 시작한다.

만년의 차이콥스키는 매일 아침 8시경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저는 자주 미사에 갑니다. 밤 기도도 합니다. 주말 밤 거룩한 향기에 쌓인 작고 낡은 교회에 찾아가 그 어스름함 속에서 자신을 살펴보며 영원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봅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실패를 신앙에 의지하곤 했다. 그가 남긴 베스페르’(저녁기도)리투르기’(미사곡)는 이러한 작곡가의 깊은 종교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사회적응의 실패와 끝내 파경으로 치달았던 결혼생활이 이중으로 겹쳐져 늘 암울한 구름에 덮여 있던 그에게 호흡은 오히려 귀찮은 존재였다. 더구나 300년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말기인 당시, 러시아 민중은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고 있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 아래에서 끝을 모르는 밑바닥 생활에 몸부림치며 고통 받는 국민의 비참한 모습을 섬세한 신경을 가진 차이콥스키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창에는 러시아 민중의 처절한 상황에 반추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작곡가 스스로 최고 역작으로 여긴 마지막 교향곡은 폰 메크 부인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으며 러시아 민초들의 애환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마지막 교향곡이... 레퀴엠에 가까운 분위기로 꽉 차 있다는 상황이 저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18939월에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이미 작곡가는 교향곡이 진혼곡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310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황실 교향악단(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비창을 초연했다. 차이콥스키의 얼굴은 창백했다. 우울한 도입부에 이어 바이올린군이 드디어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러시아 대륙의 무한한 생기가 소생되었고, 이면에는 운명의 장난으로 영원히 이별한 폰 메크 부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마침내 그 모든 상념은 마지막 아다지오 라멘토소에 집약되어 맥박은 끊어졌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무엇보다 종결부가 떠들썩한 알레그로가 아니라 정반대인 매우 길게 늘어진 아다지오라는 점이 청중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 결과는 작곡가에게 또다시 깊은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이미 정신적인 재기는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이미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초연이 끝난 다음날 교향곡은 완전한 제목을 얻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의 집을 방문했을 때 표제를 붙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님 비극적이라는 표제는 어떨까요?” 장고를 거듭한 차이콥스키는 “‘비창이라고 하면... 그래 좋아 모디! 브라보! ‘비창이야.” 라고 말하면서 스코어에 적어 넣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이 또한 차이콥스키에게 죽음을 부르는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1854년 평소 깊은 사모의 정을 품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어머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콜레라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111일 동생 모데스트와 함께 드라마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라이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던 차이콥스키는 주위 사람들이 말릴 겨를도 없이 끓이지도 않는 네바 강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바로 다음날부터 발열이 시작되었으며 오후에는 콜라라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는 이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해.” 동생 모데스트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113일에는 약간의 차도가 있었으나 입 언저리에는 콜레라 특유의 반점이 있었다. 마침내 일요일인 115일 의식불명에 빠졌다. 맥박은 더욱 약해졌고 온몸이 땀에 적어 있었다. 다음날 새벽 3시 차이콥스키는 갑자기 눈을 떴다. 얼굴에는 뚜렷한 의식이 되살아났다. 그의 옆에 있는 세 사람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더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잠깐 동안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반짝이더니 곧 마지막 숨과 함께 꺼져버렸다. 영혼을 다시금 신께 드린 것이다.

 

 

운명은 그에게 신의 선물인 천재성을 주었으나 인간의 능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에 찾아온 수많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그 누구도 그의 그토록 슬프고도 조화되지 않은 그의 실제 생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확히 12일 후, 초연했던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다시금 비창이 성대하게 연주되자 비로소 청중들은 오열하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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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필하모니아 볼쇼이홀

 

 

1악장의 서주는 아다지오다. 콘트라베이스가 피아니시모로 공허한 울림을 주면 바순이 신음하는 민중의 아픔을 대변한다. 순간순간 다이내믹의 변화를 주며 어두움이 엄습한다. 주부는 템포가 반전되어 알레그로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이것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다. 운명과의 투쟁의 시작이다. 정점을 벗어나면 안단테로 꿈결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D장조의 현악기로 제시된다. 이야말로 지극히 차이콥스키적인 테마이다. 교대로 나타나는 목관군의 노래는 대단히 몽환적이다. 느닷없이 알레그로 비보의 강주(强奏)로 사투가 시작된다. 억압받는 민중의 봉기이며 작곡가 내면의 용트림이다. ‘비창1악장은 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동시에 이것은 작곡가가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두 번째 전개부가 주는 절규는 바로 이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안단테 모소의 최후는 기도와도 같은 경건함으로 끝을 맺는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아가는 느낌이다.

 

 

2악장의 4분의 5박자는 그대로 러시아 민요가 된다. 고난 가운데 이따금씩 비치는 햇살과도 같이 천진난만한 미소가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분위기는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낸다. 중간부의 주선율은 달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감각적인 엘레지의 향기를 풍긴다. 가슴을 타고 흐를 때 한없는 울적함이 드리워진다. 다시 힘겨운 춤이 시작되고 이내 제풀에 지쳐 쓰러진다.

 

 

스케르초가 타란텔라주제로 활기차게 울려 퍼진다. 주제가 진군하는 동안 4박자의 행진곡이 끼어들어 맛을 더한다. 현악기의 트레몰로는 악장 전반을 리드해 간다. 목관군은 여기저기서 목청을 돋우며 양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금관군의 나팔은 러시아 제국의 위대한 군대의 행진을 연상시킨다. 네프스키 대로를 걸어가는 기마병의 위용이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잘 포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다가올 죽음에 대한 마지막 절규에 불과하다. 단말마는 광적인 널뛰기로 마감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슬픔이 또 있을까? 고금의 수많은 레퀴엠조차 이보다 더한 비애를 담아내지는 못했으리라. 드디어 피날레 아다지오 라멘토소. 글자 그대로 눈물의 아다지오로 죽음의 서막은 막을 올린다. 현악기의 주제가 뒤틀려가며 위로, 위로 치솟아 올라간다. 그 끝은 결국 천국. 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 바순이 지옥의 사자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일순간 중간부의 주제가 다시 소용돌이치며 상승한다. 서서히 포르테로 가열되어 모든 악기가 고막이 찢어질듯 울부짖으며 솟구친다. 그 절정에서 팀파니의 두 번 연타에 이어 일순간 숨이 멎는다. 짧은 휴지기는 말할 수 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주체할 수 없는 격한 심장박동은 다시금 비가의 테마가 도드라지는 가운데 제 속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대로 죽음에 이르기는 아직 이르다. 통곡은 다시 계속된다. 금관군이 피를 토하며 헐떡이는 가운데 현악기는 파도를 출렁이며 격렬한 몸부림을 친다. 이윽고 탐탐의 짓눌린 일격 뒤에 트롬본과 튜바가 죽음의 문을 두드린다.

콘트라베이스의 흐느낌 위에 고음악기들이 천국의 노래를 슬프게 부른다. 삶의 모든 아픔이 여기에 응집되어 저 세상에의 희망을 갈구한다. 이는 바로 신에 대한 거역 없는 복종의 뜻을 내포한다. 마지막 25마디 현악기의 합주 속에 인간의 숨결은 부드러운 여운으로 침잠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풍진 세상을 뒤로하고 천사의 손에 이끌려 끝내 영혼은 비상한다.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표현되는 마지막 5번의 맥박이 끊어질 때 마침내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그렇게 가야만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던 어느 유학생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적으며 기나긴 비창의 여정을 마칠까 한다.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비창교향곡 4악장이 끝이 났지요. 저는 박수가 당연히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사도 하지 않고 요지부동인 지휘자와 단원들을 앞에 두고 객석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요. 점점 객석 전체로 확산되더군요. 그때서야 지휘자와 단원들은 조용히 일어서서 그냥 퇴장하더군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때 깨달았지요. ‘비창교향곡의 참된 의미와 러시아 예술의 힘을 말이죠.”

 

 

/사진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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