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회 LP감상회 - 페라스와 정경화의 브루흐 > 강의 행사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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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행사일정

[LP감상회 일정] 제 12회 LP감상회 - 페라스와 정경화의 브루흐

클라라하우스
2018-03-22 05:34 2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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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클라라하우스 LP감상회

<봄에 만나는 브루흐>

크리스티앙 페라스 & 정경화 바이올린 협주곡

 

 

* 일시: 324() 오후 3

* 해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 입장료: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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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음반

1.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크리스티앙 페라스, 바이올린/ 발터 주스킨트,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9EMI Angel 초반/ 1958725일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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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정경화, 바이올린/ 루돌프 켐페, 지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2년 데카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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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요

- 이미자 동백아가씨’ (리이슈 한정판)

- 이광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오리지널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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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인치 싱글의 향연

- 핑크 플로이드 ‘See Emily Play’ (19672번째 싱글/ 리이슈 핑크 싱글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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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바 ‘Gimme Gimme Gimme’ (1980년 오리지널 싱글 LP)

- 보니엠 ‘Sunny’ (1967년 오리지널 싱글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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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팝 명반 컬렉션

- ‘Radio Ga Ga’ (1984년 오리지널 LP)

- 탈리아 ‘Primera Fila’ 앨범 블루레이 (Thalía 1971/ 2009729일 마이애미 BankUnited Center 실황)

- ‘Radio Ga Ga’ (1986년 웸블리 스타디움 라이브 DVD)

- Roy Orbison 'In Dreams' (리이슈 한정판)

- 잭슨 브라운 'Stay' (No Nukes 라이브/ 1979년 핵무기 반대 자선콘서트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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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봄을 알리는 3월 클라라하우스 LP감상회는 크리스티앙 페라스와 정경화의 한판 승부로 펼쳐집니다. 49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페라스. 오랫동안 극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린 거장이었지요. 자살의 한 원인이 카라얀과의 음반 작업으로 인한 스트레스이기도 했다는 설도 있는, 무소불위의 관력을 쥐고 있는 카라얀에게 유리잔처럼 연약했던 페라스의 영혼이 어떠했을지 짐작도 갑니다.

그래서 혹자는 카라얀과 함께 작업했던 많은 음반보다 1950년대 후반 20대의 페라스가 남긴 연주를 최고로 꼽는 경우도 있습니다. 페라스의 6번째 공식 음반인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라기보다는 신비롭게 찬연히 타오르는 불꽃같은 느낌, 유리관이 연소하는 듯 푸른 불빛이 일렁이는 현의 질감.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젊은 페라스의 아우라로 가득한 명반입니다. 흔히 나와 있는 60, 70년대 페라스의 연주와는 확연히 다른... CD로 들어도 좋지만 역시 1958년에 녹음해 1959년에 출시된 LP초반으로 들어야 제 맛일 터! 고가이면서도 희귀 음반인 페라스의 브루흐, 클라라하우스에서 드디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정경화는 어떨까요? 아래 붙인 글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사운드와 열정은 페라스와는 또 다는 대비를 이룹니다. 20대 초반 정경화의 정열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7인치 싱글LP로 듣는 핑크 플로이드와 보니엠, 아바! 45회전 LP의 압도적인 사운드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 애호가들에게 대세로 떠오른 탈리아의 고화질 라이브.

퀸의 웸블리 구장의 전설적인 라이브,

이미자와 이광조의 아련한 노래들...

 

 

주옥같은 음악으로 수놓아질 12LP감상회, 음악애호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아래 정경화와 페라스에 관련된 자료글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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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객석 201210월호

디스코바이오그라피5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1

 

 

글: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4악장의 마지막 음이 불꽃으로 타오르며 연주회의 막이 내렸다. 막내아들은 갑자기 붉디붉은 장미꽃 한다발을 들고 무대를 내려와 객석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 부둥켜안았다. 얼마 전 다리를 다쳐 거동조차 힘든,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아들에게 안겨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때까지 드문드문 기립박수를 보내던 청중은 마침내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대 위에 있던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남동생과 어머니를 맞으며 서로를 감쌌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20049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정트리오가 평생을 자신들을 위해 헌신한 86세 어머니께 바친 공연은 1958년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가족음악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트리오로서도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필자는 이날 공연 전 정트리오의 세 멤버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뿐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까지 한꺼번에 인터뷰하는 행운을 맛봤다.

 

 

감개무량합니다. 경화가 며칠 전에 그러더군요. 나이 50세까지는 어머니 말에 무조건 순종했으니까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구요. 특별히 제가 한 것이 없어요. 아이들이 제 말을 너무 잘 들었으니까요.”

 

 

지난해 타계한 고 이원숙 여사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방식대로 모든 공을 자식들에게 돌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이러한 가족의 사랑을 가장 잘 구현한 곡은 다름 아닌 브람스의 첫 작품인 피아노 트리오 1번이었다. 브람스가 클라라의 집에서 초연한 사랑노래는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思母曲)으로 화하며 감동을 더했다. 1987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녹음된 음반에서 들었던 같은 곡의 은은하고 정갈한 느낌은 실연에서 더한 원숙미를 풍겼다. (DECCA 421 4252) 이후 정트리오는 20115월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 1213일 이화여대강당에서의 추모공연으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정경화! 1970년대와 80년대, 그 이름은 대한민국 클래식 연주자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다. 1984년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지방 소도시에 살았다. 그때 시청 앞에 있던 작은 레코드 가게는 가요와 팝음악 일색이었지만 한 귀퉁이에 클래식 코너가 있었다. 그해 가을로 기억된다. 매번 목록이 똑같은 팝송판고르기에 지친 필자에게 한 여인의 얼굴 옆모습이 음반재킷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LP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영어 고딕체로 ‘KYUNG-HWA CHUNG'을 먼저 읽을 수 있었고 나머지 작곡가와 곡명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정경화, 음악선생님께 얼핏 들은 이름이었다. 바로 옆자리에는 얼핏 촌스럽게 느껴지는, 야외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노랑, 분홍 꽃가지에 둘러싸인 정경화의 상반신이 표지로 보이는 음반이 하나 더 있었다. 이무지치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와 카라얀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 운명정도가 클래식라이브러리의 전부였던 당시, 두꺼운 참고서 세권을 살 수 있는 거금을 지불하고 정경화를 2장의 LP로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먼저 꽃처녀정경화의 음반부터 턴테이블에 걸었다. 라이센스 LP 뒤에 한글로 적힌 곡 제목 파르티타 제2은 무슨 암호 같았다. 도무지 이해불가의 음악 감상은 채 5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결국 정경화와의 첫 데이트는 10년의 세월이 지나 대학 졸업하는 해에 이르러 바흐의 근원을 파헤칠 때 비로소 밤새 눈물로 지새우며 재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반주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이 커플링된 이 음반은 197426세의 꽃다운 정경화가 최초로 도전한 바흐 녹음이었다. 놀랍다! 20대 젊은 여인이 연주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열한 정신과 초절기교는 샤콘느에서 찬연히 타오른다. 소나타 3번의 라르고는 가장 천천히 연주한 시게티보다도 10초가 느리고 하이페츠의 광속 활긋기와는 무려 1분 이상 차이가 난다. 오죽하면 음악평론가 이순열이 ()으로의 변용라고 표현했을까. 질풍노도의 시기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고 안으로 침잠하는 절제를 일찌감치 터득한 정경화의 무반주는 그래서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그 겸손은 나이 60이 넘어 전곡 연주에 도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했다. 올해 드디어 정경화는 국내 무대에서 거울 앞에 돌아와 선 누이의 심정으로 바흐 무반주 시리즈를 진행했으니... (DECCA SXL 6721)

 

 

하지만 브루흐는 달랐다. 작곡가가 누구인지 곡이 어떤 내용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도 들을 만했다. 시원시원하게 크게 보이는 옆모습만큼이나 음악은 질주했다. 바흐에 실패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3악장까지 한 번에 달려갔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마치 굶주린 암사자같이 달려들다가도 어느새 청명한 사슴의 눈동자가 비쳐지는 야누스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1악장에서 악구 시작점의 어택은 헤비메틀 음악만큼이나 강력했으며, 2악장의 동양적인 냄새는 한국 여인의 가녀린 심성과 너무도 닮아 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후의 쉼이 거기 있다. 1972년 발매된 정경화의 두 번째 음반은 필자에게 평생을 함께 안고 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LP 소리골이 닳을 대로 닳아 같은 음반을 다시 구해 들어야 했다. 수없이 많은 브루흐의 협주곡 명반 가운데 당연히 정경화가 가장 높은 곳에 있음은 물론이다. (DECCA SXL 6573)

 

 

이렇게 시작된 정경화 사랑은 당연히 1970년에 녹음한 데뷔음반으로 향했고 시벨리우스의 협주곡 또한 정경화를 통해 첫 경험을 맛봤다. (DECCA SXL 6493) ! 1악장 도입부에서 번져오는 북구의 서늘한 기운은 소름을 돋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이런 처연한 음색을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으며, 언제나 무대에서 쓰러져서 나온다는 각오로 올라가고, 100번이 아니라 1만 번을 태어나도 다시 하고 싶을 만큼 바이올린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벗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경화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표정들이 갑론을박하며 벌이는 그녀의 바이올린은 참으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불과 22세의,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인에게 이토록 강인하고 섬세한 음악혼이 꿈틀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시벨리우스와 함께 담긴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은 다소 육즙이 빠져 허한 느낌이라는 게 중론이다. 정경화는 11년 뒤 지휘자와 악단을 바꿔 샤를 뒤트와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시 한 번 차이콥스키에 도전했다. 앞선 녹음이 화려한 외관을 강조하는 ()’의 세계라면 후자는 농익을 대로 농익어 자신을 뒤로하고 음악을 앞으로 내세우는 ()’의 경지에 도달한 형국이다. 두터운 질감은 압권이다. (DECCA SXDL 7558)

 

 

적당히 편안히 하거나 타협해서는 결코 살아 있는 연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연주자는 홀로 씨름하면서 울고 웃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정경화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이 말은 어린 시절 일찌감치 터득한 자신만의 신조였다. 1948326일 정경화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플루트를 전공한 큰언니 명소와 첼로를 공부하는 작은언니 명화에 이어 자연스럽게 그녀는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며 7명의 자녀들은 자의든 타의든 음악을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자식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으로 가는 피난길에 어머니는 피아노를 짐 속에 실었다. 이러한 지극정성 속에 냉면집 딸들은 승승장구했다. 9세에 서울시향과 협연한 정경화는 열 살이 넘으면서 국내에서 이미 경쟁자가 없을 만큼 천재를 드러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이화여대강당에서 공연하던 미국 악단의 중간휴식 시간에 깜짝 출연한 정경화의 연주를 눈여겨 본 단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여기저기에 소개한 뒤 직접 초청을 하기에 이른 것. 마침내 정경화는 1960년 언니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이반 갈라미언 교수의 제자로 들어가기까지, 아니 그 후로도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자신을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가족은 2년 뒤인 1962년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로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장기체류 비자를 받기 위해 남동생 셋도 그럴듯한 콩쿠르 우승 트로피를 받아야만 했다. 거기엔 정명훈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가족은 시애틀에 짐을 풀고 마침 시애틀 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대회장에 식당을 열었다. 살 길이 막막하던 가족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박람회가 끝난 뒤에는 시애틀대학 근처로 옮겨 오픈했다. 이역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족은 죽기 살기로 일해야 했다. 하루 20시간씩 노동했다. 정명훈은 식당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거장의 요리솜씨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또한 정명훈은 이때 제이콥슨 여사를 만나 피아노 수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정경화도 뉴욕에서 시애틀로 올 때면 집안일을 도왔다. 시애틀은 이들에게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시장까지 나서서 시민 600명의 서명을 받아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트리오는 시애틀에서 자주 연주회를 열었고, 전문 연주자로 자리 잡은 후에도 정경화는 제라르 슈워츠가 지휘하는 시애틀 심포니와 기꺼이 협연무대를 가졌다.

 

 

1967년 정경화는 아이작 스턴, 이착 펄먼 등 유태계가 주름잡고 있는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역시 유태인인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이 콧대 높은 경연장에서 작은 동양인 소녀가 우승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콩쿠르 우승 후 정경화의 귀국 행사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 가는 성황을 이뤘다. 청와대 초청은 당연한 것이었고 가난에 지친 조국은 그녀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1968년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미국 순회 공연에 돌입했다. 19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유럽 데뷔 무대를 가졌는데 차이콥스키 협주곡에서 리허설 당일 멘델스존 협주곡으로 곡을 바꿔버렸다. 정경화는 사전예고도 없는 무례한 악단에 맞서 아무렇지도 않게 리허설을 마쳤다. 그제야 런던 심포니 단원들은 그녀를 진정한 연주자로 인정하고 데뷔 음반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데카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것도 이때였다. 1969년에는 닉슨 대통령이 독일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에 정경화를 백악관에 초청했다. 양국 정상 앞에서 약관 20세의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는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때부터 정경화는 매년 120회 이상의 연주를 소화하며 음반 녹음도 병행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1975년 런던 킹스웨이홀에서 녹음한 생상스의 협주곡 3번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 곡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강인함과 애절함, 동시에 단아한 여성미까지 겸비한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여기에 완벽한 기교까지 덧입혀 최상의 연주를 구축했다. 2악장 플루트와 대화하는 바이올린의 슬픈 노래는 눈물마저 마르게 한다.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맞서는 그녀의 솜씨는 골리앗과 대적하는 다윗의 형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프레이징과 날카로움은 이내 내면에서 우러나는 여인의 향기와 결합해 팔색조의 날개짓을 보여준다. 로렌스 포스터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또한 안정적인 뒷받침으로 조력한다. 생상스의 음악이 이토록 격정적이었던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절대명연이 여기에 있다. (DECCA SXL 6759) 이같은 정경화의 다이내믹하고 온화한, 절묘한 이중성은 엘가의 협주곡(DECCA SXL 6842)1980년에 발매된 베토벤의 협주곡(DECCA SXDL 7508)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데카 시절 정경화의 실내악 음반은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라두 루푸의 피아노에 실리는 그녀의 감탄할만한 해석은 이 난곡을 고아한 한편의 시로 승화시켰다. 펭귄가이드에서 로제트 표지를 받을 만큼 완벽한 연주는 어지간해서는 감동받기 힘든 프랑크의 장엄한 소나타를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니면서 열락의 순간으로 인도해간다. 이 곡에 관한한 다른 음반을 목록에 추가할 필요가 없는 지존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DECCA SXL 6944)

 

 

1984년 정경화는 영국인 제프리 리게티와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결혼한 이듬해 발매한 최초의 소품집 콘 아모레는 사랑하는 남편이 타이틀을 지어준 매력만점의 명작이자 사랑노래다. 정경화의 음반 가운데 가장 많은 18만장을 팔아치운 스테디셀러다. 대중음악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이 판매량은 실로 어마어마한,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다. 국내에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처음 소개해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 3분여의 짧은 곡에 무려 26개월이라는 시간을 쏟아 부으며 절치부심했다고 하니 그 프로정신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쉬어가는 소품집에 이토록 치열한 음악성으로 무장한 채 우리 곁으로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곡 한곡이 거대한 교향곡의 맞먹는 흡인력으로 듣는 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DECCA 417 289-2)

 

 

데뷔 음반에서부터 정트리오의 1987년 브람스 트리오 음반에 이르기까지, 정경화의 데카시절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완벽함이 모든 연주에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음악가는 어릴 때는 자신을 위해 살고 젊어서는 청중을 위해 살고, 보다 더 나이가 들면 신을 위해 산다고 말하는 정경화. 그녀는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 아시아 변방의 나라와 여성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동시 극복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우리의 절친한 음악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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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비범한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

* 아래는 피아니스트 김주영 선생님의 글입니다. *

 

 

음악계에는 너무나 일찍 세상과 이별한 천재 음악가들이 많죠. 평소 별 감흥이 없던 음악가들에게 사망한 후 특별한 그리움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말하듯 그 뛰어난 재능을 하늘이 시기하여 일찍 데려간다는 속설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인물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의 인물은 그렇게 훌쩍 우리 곁을 떠난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천재성과 연주 실력 등 음악가로서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지녔던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우울증과 이에 따른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50세도 되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해 버린 안타까운 사연의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입니다.

 

 

애호가들에게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이름은 지휘자 카라얀과 협연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통해 기억되는 것 같은데요, 저도 베토벤의 협주곡을 맨 처음 들었습니다.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데요, ‘바이올린 소리가 이럴 수도 있구나하면서 감탄했던 생각이 납니다. 한 마디로 정말 질감이 단단한 소리, 빈틈없이 정확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테크닉이 귓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경험을 제공해주었죠. 그런 그가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1933617일 벨기에의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르 투케(Le Touquet)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6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0세에 니스의 콩쿠르에서 우승했죠. 남프랑스의 니스 음악원을 졸업하고 파리 음악원에 진학, 그곳에서 르네 베네뎃티와 조세프 칼베를 사사했습니다.

 

 

1946년 바이올린 부분 1위로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였으며, 그 무렵 명교사이자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죠르쥬 에네스쿠에게 배웠죠. 같은 해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하여 파리 데뷔를 했구요, 1949년 롱-티보 국제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하면서 유럽 악단에 데뷔하게 됩니다. 그 무렵 평생의 파트너였다고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 피에르 바르비제와의 듀오 연주를 시작했고, 장 피에르 랑팔 등과 함께 바흐의 작품들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칼 뵘이 그의 실력을 듣고 1951년 빈 필에 초청했는가 하면, 1959년에는 예후디 메뉴힌, 파블로 카잘스, 빌헬름 켐프 등과 협연을 가지면서 20대답지 않은 성숙함을 보여주었죠.

 

 

잘 알려진 카라얀과 녹음작업을 시작한 것은 1964년으로, 브람스의 협주곡을 시작으로 시벨리우스, 차이코프스키, 베토벤, 바흐 등의 작품이 이어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페라스는 건강상의 이유로 1975년 갑작스런 은퇴선언을 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잦은 공연 때문에 가족과 늘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했다고 하죠. 고독감이 결국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했고, 알코올 중독의 길로 이끌게 되는데요. 1982년에 재기하여 몇 차례 공연을 더 가졌지만 끝내 1982914일 파리에서 자살로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그가 좀 더 오래 활동을 했더라면... 이라고 상상할수록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죠. 페라스의 음반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거의 모두가 명연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협주곡 분야에서 호평을 받았고 프랑스 근대 작품, 실내악과 소품 연주에도 매우 뛰어났죠. 프랑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독일작품도 잘하였으며 스트라빈스키, 베르크 등 20세기 작품도 설득력이 강한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 콤비로 낸 협주곡 시리즈가 인기면에서는 우선으로 꼽힐만하고 피아니스트 바르비제와 협연한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1>,<2>,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기욤 르쾨의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등도 오랫동안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녹음입니다. 페라스는 일생동안 1728년산 "Milanollo", 1721년산 "Prasident"2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여 명반들을 남겼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답고 품위있는 소리의 주인공 페라스,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중에는 카라얀과의 음반을 통해 너무 빨리 유명세를 치른 것이 그에게 부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알기 힘들지만, 그렇게 갑작스레 화제가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 타고나게 약한 심성이나 내성적인 성격 등과 겹쳐서 마음의 병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재능과 성격, 일에 대한 조절과 관리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책임이지만, 늘 인기의 중심에 있었던 거장 카라얀과의 활동이 부담스럽게 작용했던 연주자들이 몇 명 있었죠.

 

 

불가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역시 카라얀과의 만남으로 유명해졌지만, 그의 지휘 아래에서는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카라얀과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을 녹음했던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마르크 젤쳐도 생각나네요. 그 음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안네 소피 무터 역시 소녀 시절 카라얀과의 만남이 생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경우는 음악적인 성숙함이 나타난 시기가 카라얀 사후였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덜 받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밖에 젊은 시절 카리스마 강하던 지휘자 죠지 셸과 자주 협연했던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 같은 인물도 있죠.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오른손의 장애를 겪었지만, 현재는 다시 회복하여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장과 선배 음악인들 사이에서 함께 활동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 성장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례들인데요, 예술의 길, 예술가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페라스가 남겨 놓은 연주를 들으며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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