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감상회 일정] 제7회 LP감상회와 오디오시연회
본문
<제7회 LP감상회 및 오디오 시연회>
* 주최: 클라라하우스(대전)
* 일시: 10월 28일(토) 오후 3시
* 티켓: 입장료 15,000원 (커피 및 음료 제공)
* 해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 예약문의: 042-861-5999, www.clarahouse.kr
* 개요
- 아날로그의 감성을 일깨우는 클라라하우스 LP감상회. 7회째를 맞아 더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감동의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이번 감상회는 하이엔드 오디오 시연회도 겸해, 실연과 맞먹는 사운드로 귀를 즐겁게 할 예정입니다.
* 감상 프로그램 소개
- 메인 프로그램은 러시아 최고의 거장 지휘자인 예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감상합니다.
<므라빈스키의 자택 2002년 1월 방문>
- ‘비창’ 교향곡은 므라빈스키와 여타의 다른 지휘자들로 나눠질 정도로 절대명연을 들려줍니다. 그 세밀한 디테일과 대륙적인 스케일감, 송곳처럼 찌르는 현악기의 질감과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운 금관군의 포효! 이에 필적한 연주는 키릴 콘드라신의 모스크바 필하모닉 정도일 뿐일 겁니다.
- DG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첫 서방 순회연주회에서 므라빈스키에게 사정사정해 드디어 첫 녹음을 해서 나온 교향곡 4, 5, 6번. 이 역사적인 녹음은 차이콥스키 교향곡의 레퍼런스로 오래도록 군림해왔습니다. 예전 LP시절 라이선스로도 출반돼 인기를 끌었습니다.
<서방에서 첫 레코드 녹음을 하고 개런티를 받을 수 없는 구소련 체제로 인해 DG에서 선물로 보내준 스타인웨이 피아노>
- 클라라하우스에서는 오리지널과 라이선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출시된 리이슈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출시된 리이슈반은 아주 복각이 잘되고 음질도 좋은 것 같습니다. 여러 버전의 음반을 비교해서 감상합니다. 해설자가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지 취재한 므라빈스키 미망인 인터뷰와 귀중한 자료 사진은 더욱 현장감 있는 감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 여기에 과거 80년대 중반 아이돌그룹의 대표자였던 아하의 언플러그드 라이브와 재즈계의 전설인 찰리 헤이든과 팻 메스니가 함께한 ‘미주리 스카이’ 앨범, 양희은 3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연실의 ‘찔레꽃’ 등 최근에 출시된 팝과 가요의 명반들도 함께 즐깁니다.
* 오디오 시연회
- 이번 클라라하우스 LP감상회는 최근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 소누스 파베르 ‘아마티 트레디션’ 스피커와 독일 진공관 앰프의 자존심 옥타브 프리앰프 HP700, 모노블록 파워앰프 MRE220 시연회를 겸합니다.
- ‘아마티 트레디션’은 현재 클라라하우스에 메인으로 세팅된 ‘아이다’의 둘째 동생 격으로 ‘아마티’ 시리즈의 최근 모델입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외모와 이탈리아 장인의 숨결이 배인 스피커는 보는 것만으로 무한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레드 바이올린 마감의 ‘트레디션’은 전통의 현악기 소리 뿐 아니라 대편성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음향으로 클라라하우스를 가득 채울 예정입니다.
- 옥타브 프리앰프 HP700은 몇 년 전부터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고 놀라운 성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따로 독립된 전원부에서 공급되는 안정적인 전기를 기본으로 진공관 앰프 특유의 뉘앙스는 물론 세밀한 표현력까지 하이엔드 프리앰프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 옥타브 MRE220 모노블록 파워앰프는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수상해 온 RE290 스테레오 파워앰프와 MRE130 모노럴 파워앰프를 베이스로 새롭게 설계된 고성능 앰프입니다. 새롭게 개발된 KT120 출력관을 최고도로 활용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KT120을 위해 OCTAVE가 설계한 파워앰프 제2탄 RE220은 지금까지 진공관 앰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하이 퍼포먼스를 실현하였습니다. 순간 최대 출력은 300W, RMS 최대 출력은 220W/4Ω를 자랑합니다. 출력의 주파수 특성은 20Hz에서 70 kHz에 이르며 S/N는 116dB를 상회합니다. 웬만한 스피커는 간단하게 제압하며 구동합니다. 디자인 또한 독일 특유의 우직함과 심플함이 엿보이는 우아함이 엿보입니다. 30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는 대단히 안정적입니다.
* 클라라하우스 아날로그 LP턴테이블 시스템 안내
1. 턴테이블: 닥터 페익커트 Firebird
2. 톤암1: Reed 3Q
3. 톤암2: SME 3012R
4. 스테레오 카트리지: 트랜스피규레이션 프로테우스
5. 모노 카트리지: 미야지마 모노 Zero
6. 스테레오 카트리지: 고에츠 우루쉬 블루
7. 옥타브 포노앰프
<옥타브 포노앰프>
* 감상프로그램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 아래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가 월간객석에 기고한 므라빈스키를 추억하는 글을 붙입니다.
월간객석 2017년 6월호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음악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음악은 인간의 삶에 있어 제1순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음악이 없다는 것 또한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음악의 힘을 믿는다. 언젠가 음악을 들을 때 마치 벼락이 치는 것과 같고, 해머로 무엇인가를 강하게 때리는 것과 같은 강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이렇게 예술이란 강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술에 대한 결론이며 청중에게 그리고 연주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므라빈스키의 어록 중에서)
우리에게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은 황혼녘에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음악은 가슴에서 솟아나, 오로지 가슴으로 얘기를 걸어온다. 그건 사랑이다! 음악이라는 여신의 자매는 시(詩)의 여신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슬픔’ 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음악은 정교회의 종소리, 가슴, 사랑, 시, 슬픔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2003년 1월 므라빈스키의 묘지 앞에서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PO,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를 무려 반세기 동안 이끌었던,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지휘자 예프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 그는 음악을 강렬함으로 정의했다. 강렬하지 않은 것은 예술이라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가 지휘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의 1악장을 들어보라. 얼핏 바늘로 찔러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앙상블은 철옹성으로 솟구쳐 비인간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내재된 마그마 같은 에너지로부터 분출되는 강력한 기운은 듣는 이를 거의 무아지경으로 인도해 간다. 현악기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고 금관은 정연하게 울부짖는다. 왜냐하면 그건 ‘비창(悲愴)’이니까... 디테일과 광폭함이 동시에 분출하는 것, 이건 컴퓨터처럼 정확하기만 한 요즘 악단의 음악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그래서 므라빈스키의 음악을 들으면 그의 말대로 해머로 머리를 치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인다.
왜 므라빈스키인가? 첫째 그는 정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처럼 공산당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혹자는 2차 대전에서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쌍벽을 이뤘던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 때 므라빈스키는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1941년 9월 8일 시작된 나치의 레닌그라드 포위는 1942년 8월 9일 절정에 달해 있었다. 매일같이 포탄이 시내 한가운데에 떨어지는 생지옥 속에서 레닌그라드 방송 교향악단 단원들은 며칠씩 굶어 활을 쥘 힘도, 악기를 불 힘도 없었지만 필하모니아 볼쇼이홀 무대에 올랐다. 청중도 아사 직전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쇼스타코비치가 헌정한 ‘레닌그라드’로 명명된 교향곡 7번이 처절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기적과 같은 연주실황은 라디오 방송을 타고 레닌그라드 전역으로 전달되었고 시민들은 조국에 빛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안도하기에 이르렀다. 위대한 음악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 콘서트의 지휘자는 므라빈스키가 아닌 카를 엘리아스베르그였다. 므라빈스키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스탈린은 나치의 레닌그라드 봉쇄가 개시되기 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국보급 문화재를 열차편으로 우랄산맥 깊숙한 곳으로 먼저 이동시켰다. 여기에 므라빈스키와 LPO 단원들은 아예 러시아 제3의 도시인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리스크로 보내버렸다. 음악가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셈이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므라빈스키와 스탈린과의 관계를 의심했다. 그러나 므라빈스키는 평생을 공산정권에 대해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살았다. 당국에 의해 금지된 정교회 이콘을 집에 두고 기도했고, 구소련 치하에서도 문을 열었던 레닌그라드 예수성화 교회에서 예배드린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다만 자신의 부재 시 레닌그라드의 콘서트를 책임졌던 2인자 엘리아스베르그를 사임시킨 것은 의문으로 남았다.
둘째는 인간미다. “므라빈스키는 오케스트라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모든 의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죠. 그의 오케스트라 안에서의 삶을 얘기하자면 그는 단원 모두가 갖자 훌륭한 아티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들 하나하나를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단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었어요. 므라빈스키는 단원들이 자신을 믿는 만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깝게 지낸 몇 명은 집으로도 찾아와서 음악과 문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어요. 쇼스타코비치와는 살아 있을 때 참 좋은 관계를 가졌고,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어요. 드라마 극장에도 그의 친구들이 있었어요. 인챠트카, 필란, 아마도 한국인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유명한 사람들이었죠. 훌륭한 연극인이었어요. 므라빈스키는 이렇게 연극도 좋아했고 발레도 좋아했습니다.” (미망인 인터뷰 중에서)
<미앙인 아빌란다 여사>
지휘대 위에서는 독재자였지만 지휘대를 벗어났을 때 므라빈스키는 모든 이들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단원들의 복지에 누구보다도 신경을 쓴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휴머니즘의 바탕은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무한한 지성의 시야는 작품과 인생에 있어서 진실을 깨닫기를 갈망한다. 언어를 익히고 자연철학을 배우며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이해하는 모든 것들 즉, 세상을 이해하는 길은 우리 자신이 자연 속에서 있어야 할 곳을 깨닫고 우리가 우주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점점 무언가 분명해지며 영혼이 편해질 것이다.
자연 속의 집은 마치 주님의 보금자리와 같은 세계 속에 자신이 있음을 느끼는 것이며 마치 자신을 환경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연에서 음악적인 표현을 얻고 그것을 영혼과 기억 속에 축적해 놓았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에서의 뇌성, 글라주노프의 여러 노래에서 나타나는 라도가 호수의 매력, 특히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4번 피날레의 ‘가을낙엽’이 그 예이다. 호수가 사시나무의 떨림, 바람에 부딪히는 진동, 그것은 완전히 완벽한 현악기의 트레몰로와 같았다.
습지를 지날 때 ‘백조의 호수' 서곡의 제1주제가 들렸다. 우연히 교향곡 6번 피날레의 주제와 그것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백조와 관련된 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물론 명쾌했다.’ (1953년 9월 25일 므라빈스키의 어록 중에서)
므라빈스키는 1903년 5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므라빈스키는 평생을 페테르부르크에서만 살았는데, 1988년 1월 19일 세상을 떠난 곳도 바로 페테르부르크였다. 아버지 엘렉산더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피아니스트이자 화가였다. 동물과 자연을 즐겨 스케치한 므라빈스키의 그림에 대한 소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릴 때 므라빈스키는 ‘제냐(Zhenya)'로 불렸다. 제냐가 처음 본 공연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했던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였다. 6살 제냐의 충격은 엄청났다. 스펙터클 뿐 만 아니라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산하는 조명, 샹들리에, 색깔, 의상 등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이 첫 경험은 그가 남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모음곡 음반에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191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집안은 붉은 군대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집은 몰수당했고 16살의 므라빈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마임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는 마린스키 극장의 재봉사로 일했다. 어려서부터 음악, 언어, 그림에 천재성을 보인 그였지만 1920년 명문 레닌그라드 대학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3년 뒤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더블베이스로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했다. 절치부심한 그는 이듬해 작곡과에 합격했다. 졸업 후인 1927년부터 니콜라이 말코에서 지휘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길을 찾게 되었다.
1929년 7월 19일 므라빈스키는 첫 공개 연주회에서 지휘했다. 1931년 6월 30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LPO 무대에 데뷔했다. 1938년 소연방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 LPO의 음악감독으로 지명된 그는 무려 50년 동안 이 악단을 세계 최정상으로 끌어올렸다. 장막 속에 갇혀있었던 LPO를 이끌고 첫 해외 연주를 떠난 것은 1946년, 헬싱키와 프라하에서의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드디어 1960년 서유럽 순회연주여행에 돌입했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서방에서는 가는 곳마다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이때 빈 무지크페어라인에서 녹음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 5, 6번은 지금껏 이를 능가하는 연주가 없을 만큼 절대명연으로 남았다.
“자신의 교향곡 5번이 연주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난 쇼스타코비치는 무대로 올라와 정중히 인사하고 이 곡에 몸을 바친 지휘자 므라빈스키와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의 손을 잡았다. 그는 청중의 열렬한 박수를 함께 받으려고 므라빈스키를 무대 위로 5번이나 나오게 했다. 그러나 대지휘자는 마지막에 가서 쇼스타코비치만을 가리키면서 모든 영예를 작곡가의 몫으로 돌렸다.” (1960년 런던, 페르시 카르테르 紙)
므라빈스키는 두 살 터울의 쇼스타코비치와 평생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대부분을 세계 초연 혹은 레닌그라드 초연하며 정성을 쏟았고 작곡가도 새로운 곡을 쓸 때 므라빈스키에게 상의했다. 므라빈스키가 생전에 가장 자주 연주한 곡 또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었다.
므라빈스키는 서방 오케스트라가 버린 19세기 중부유럽의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를 고수했다. 러시아 음악사전에서는 이른바 ‘레닌그라드 편성’으로 명명된,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무대 중앙에서 왼쪽으로 치우치고 목관은 중앙에, 금관과 팀파니는 오른쪽으로 두는 편성이다. 이는 1838년 개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 최적화되었는데 저음은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팀파니와 금관의 포효는 가히 압도적이다. 여기에 즉물적이고 세밀함의 극치를 보이는 므라빈스키의 병적인 집중은 숨소리조차 죽이게 하는 마력을 뿜는다.
므라빈스키는 최소 2주의 리허설을 요구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 단원들은 최소 연습 1시간 전에 도착해서 거장을 기다렸다. ‘포즈두치(Fozduch)’! 즉, ‘적이 나타났다’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면 악단에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므라빈스키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베를린 필하모닉 리허설에 푸르트벵글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과 거의 비슷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므라빈스키가 해석하는 음악은 결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폴론적인 이성에 기인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음악은 모스크바의 악단과 완전히 차별화되었다. 그리고 이면에 인간미와 삶의 철학을 투영했다. 음악은 그래서 늘 불꽃처럼 타올랐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지휘한 므라빈스키의 콘서트 티켓을 구하는 것은 그래서 로또 당첨에 비유해도 될 만한 횡재였다.
1987년 3월 6일 므라빈스키는 파이널 콘서트를 지휘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과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이었다. 11월 심장 쇼크로 쓰러져 오스트리아 빈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1월 19일 영원한 삶 속으로 들어갔다. 장례식은 거장이 생전에 다녔던 예수성화교회에서 엄수되었다.
므라빈스키는 생전에 4번 결혼했다. 1922년 므라빈스키가 19세에 결혼한 첫 번째 부인 Marianna Schwalck는 무려 15년 연상의 여인이었다. 2년 뒤 둘 사이에는 므라빈스키의 유일한 혈육인 딸 옐레나가 태어났다. 1938년 므라빈스키는 16년 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동갑내기 올가 카르포바와 재혼했다. 1960년에는 8년간의 연애 끝에 20년 연하의 인나 세리코바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새살림을 차린 므라빈스키 부부의 신혼은 4년 만에 끝이 났다. 인나가 불과 41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거장의 아픔은 상당했다. 그러던 차에 알렉산드라 바빌리나(1928~)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바빌리나는 일찍이 러시아 최고의 여성 플루티스트로 이름이 높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하고 1957년 전 소련 콩쿠르에 우승한 후 1962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유일한 여성 단원이자 플루트 수석으로 승승장구했다. 바빌리나는 상처(喪妻)한 포디움의 독재자에게 운명처럼 사랑을 느꼈다. 므라빈스키는 결국 부인과 사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바빌리나와 4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25살 어린 사랑하는 부인에게 ‘아빌란다’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아빌란다 므라빈스카야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10월 15일이었다. 북위 60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미 겨울 초입이었다. 스산한 가을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네바 강을 따라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갔다. 12시 정각, 보고슬로브스카야 공동묘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므라빈스키의 미망인 아빌란다 여사를 만났다. 5일전 음악원 복도에서 잠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을 알아보고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 거친 손, 세월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그분이 하늘나라로 간 뒤로 저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답니다. 그분이 남긴 음악과 책, 그리고 그분이 묻혀있는 이 무덤이 저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등불이지요.”
외로움이 스쳤다. 기나긴 세월의 흔적들이 미망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묻어났다. 하늘로 높게 올라간 회색 빛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길을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10여분을 걸어 드디어 목적지에 들어섰다. 아무리 공동묘지라지만 적어도 다른 묘지와는 구별되어 있을 줄 알았다. 눈을 의심할 만큼 초라한 묘지란... 한사람이 다니기에도 비좁은 다닥다닥 붙은 묘 사이에 므라빈스키의 동상과 대리석상이 있었다.
고인은 유언으로 차이콥스키와 러시아 5인조가 묻힌 국립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가 아닌, 가족들이 함께 있는 이 공동묘지에 묻어달라고 했던 것이다.준비해간 보라색 국화 한 다발을 바쳤다. 적막한 숲 속에서 순간,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비창’ 교향곡의 마지막 더블베이스의 둔탁한 맥박이 환청으로 들려왔다. 촛불을 붙이고 미망인과 함께 두 손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아빌란다 여사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음악 외에는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평생 연미복 두세 벌로 만족했고 연주여행에서 얼마의 개런티를 받았는지조차 몰랐죠. 연주여행 때는 언제나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세세한 것까지 챙겨주곤 했지요. 그가 세상을 떠나고 지금까지 저는 그의 음악과 신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어요.”
소매가 다 헤진 블라우스에 십 년은 족히 입었을 코트, 그리고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 오래된 국민차 ‘라다’를 직접 운전하는 미망인의 모습에서 남편과 동질감을 느꼈다.
“연주는 므라빈스키에게 하나의 사건이고 연주가 끝나면 뭔가 더 풍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연 하나하나가 보석이었어요. 해가 갈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가 84세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을 지휘했을 때 청중이 눈물도 흘리지 못할 정도로 감동적인 연주를 했었죠. 1975년, 쇼스타코비치 70세가 되었을 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사이클을 감행했는데 그의 나이 72세였죠. 므라빈스키는 생애 마지막까지 젊고 지혜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기 4일전까지 책상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악보가 놓여있었어요. 그리고는 빨리 이 곡을 리허설 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죠. 그의 마음은 항상 젊은 연주가였습니다.”
2003년 1월 7일 오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브스카야 나베르쥐나야 3번지에 위치한 므라빈스키의 아파트. 결빙된 네바 강이 바라보이는, 거장의 지휘자의 체취가 가득 배인 거실에서 미망인과 3년 만에 다시 만났다. 전설적인 지휘자가 살았던 집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박하고 검소한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아파트였다. 오른편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주했다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자리했다. 1960년 빈에서 DG레이블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녹음한 뒤 사례를 받을 수 없는 지휘자에게 음반사에서 집으로 보내온 바로 그 피아노다. 그 위 벽에는 1977년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있었던 LPO의 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초연 40주년 기념연주회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예프게니 알렉산드로비치는 모든 교향곡의 스코어를 이 피아노로 연주했어요. 연주회가 있는 날이면 반드시 전곡을 자신이 독주회를 하듯 피아노를 쳤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완전히 외울 정도였죠. 사마르칸트에 있는 타메르란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글이 쓰여 있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버리기 전에 세상을 버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