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일정] 제1회 클라라하우스 영상음악회
본문
<제 1회 클라라하우스 영상음악회>
* 일시: 5월 12일(토) 오후 3시
* 해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클라라하우스에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아날로그 LP감상회에 이어,
새롭게 세팅된 벤큐 4K UHD 프로젝터로 즐기는 초고화질 영상음악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물론 팝과, 가요를 넘어 오페라, 발레, 클래식 콘서트를
이제 실연에 거의 근접한 화질과 음질로 감상이 가능합니다.
이번 클라라하우스 제1회 영상음악회는,
짜릿한 감동을 느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애호가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선곡표>
1. 2015 잘츠부르크 축제 -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하이라이트
2.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하우스 - 푸치니 ‘토스카’ 하이라이트
3. 이글즈 ‘호텔 캘리포니아’ - 1977년 3월 21일 캐피틀센터 라이브
4. 비욘세 ‘아베 마리아’ - I Am...Tour 라이브
5. 아델 ‘Rolling In The Deep’ - 2012년 라이브
6. 퀸 ‘보헤미안 랩소디’ - 1986년 부다페스트 라이브
* 기타 4K 동영상, 영화 시연회
예술의전당 매거진 <Beautiful Life>
2018년 5월호
글/사진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클라라하우스 대표
<모차르트 22 오페라>
“신(神) 앞에서 바흐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천사들이 모이면 언제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길 것이라는 것을.”
카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사들의 숨소리 같은 티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천사들의 숨소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이르면 인간의 숨소리까지 포용한다. 모차르트가 평생에 걸쳐 가장 천착한 분야는 다름 아닌 오페라였다. 왜냐하면 생계를 위해, 당대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오페라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천사와 인간이 함께 공존한다. 아득히 높은 천상의 세계와 아귀다툼하는 인간의 세계가 선혈이 낭자하게 대비되며 직설적으로 그려졌다. 이건 베르디, 푸치니, 바그너조차도 따라올 수 없는 모차르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다.
2014년 10월 31일, 베르디의 ‘해적’, ‘스티펠리오’가 초연된 유서 깊은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는 모차르트가 10대 후반에 작곡한 ‘양치기 임금님’이 뉴프로덕션으로 막을 올렸다. 2막, 아민타의 아리아 ‘당신을 사랑하고 영원할 겁니다’를 부르는 소프라노 알리다 베르티가 허공을 휘저으며 나아갈 때 객석 5층까지 가득한 청중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바로 천상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외침이 아니고 무엇이랴!
2006년 1월 28일,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빈 국립오페라에서 공연된 ‘피가로의 결혼’ 4막. “딴 사람들은 잘 참는데 피가로는 왜 그러지?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을 텐데. 이 세상에서 귀족에게 싸워봤자 결코 이길 수 없어, 90퍼센트는 귀족이 이기게 되어 있거든.” 조금 전 자신과 결혼한 수산나가 백작과 바람이 난 줄 아는 피가로는 분기탱천해 있었다. 음악가 바질리오가 화내는 피가로를 비꼬며 던지는 레치타티보에 객석은 동시에 절망했다. 모차르트가 그토록 원했던 기존 계급사회에 대한 도전과 반항이 바질리오로 인해 꺾이는 순간. 인간 모차르트의 처절한 외침이 바질리오를 통해 그대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10퍼센트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고, 그 희망을 후배 베토벤은 결국 성취했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지칭한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 1호’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였다. 당대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맞서간 풍운아이자 혁명가였다. 일찍이 ‘질풍노도 운동(Strum und Drang)’과 프리메이슨 사상에 심취해 사회 변화를 꿈꾼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그 중심은 늘 인간이었다. 소수의 귀족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꿈꾸는...
“베토벤의 경우 시대별로 눈부신 비약을 해 핵 폭발성 발전을 거듭하게 되지만 모차르트의 경우는 그런 변화는 없다.” 음악평론가 이순열의 말처럼 모차르트는 유아기를 벗어나면서 시간의 변화를 거의 초월했다. 한 해 한 해 연륜을 쌓아가면서 이룩되는 성장이 소년기를 벗어나면서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지천명을 넘어서야 느낄 수 있는 노숙함조차도, 어린 시절 전 유럽을 다니는 연주여행으로 이미 우주를 경험하며 지니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역설적으로 죽는 순간까지도 고스란히 ‘어린이’였다. 이는 오페라의 진행 순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모차르트의 첫 오페라는 불과 11살에 작곡한 ‘첫째 계명의 의무’와 ‘아폴로와 히아친투스’다. 2006년 잘츠부르크 축제와 2008년 대구오페라축제에서 초연한 ‘어린이의 작품’은 그러나 놀라운 표현력과 거침없는 진행이 ‘어른의 작품’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1768년에 쓴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의 유쾌함 속에 감춰진 영롱한 아름다움은 이미 ‘마술피리’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동시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절대 권력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권유로 야심차게 써내려간 ‘가짜 바보 아가씨’는 최초의 오페라 부파였다.
모차르트는 ‘세리아’와 ‘부파’로 나뉘는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을 이미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14살에 발표한 정통 오페라 세리아 ‘미트리다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있고 이듬해의 ‘알바의 아스카니오’는 ‘피가로의 결혼’의 러닝타임을 뛰어넘어 무려 3시간 30분에 이르는 장대한 길이로 보는 이를 질리게 할 정도다. 모차르트는 이로써 독일어 징슈필, 오페라 부파와 세리아 등 당시 유행하던 모든 장르의 오페라를 관통하며 10대에 이미 대가(大家)급 경지에 올라섰다.
1772년 12월 밀라노 두칼레 궁전에서 초연했던 ‘루치오 실라’는 모차르트가 10년 뒤 사표를 던지고 지긋지긋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새장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신호탄이었다. 이 오페라로 인해 피렌체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이탈리아에 정착하려던 모차르트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래서 ‘루치오 실라’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1781년 뮌헨 궁정극장에서 공연한 ‘이도메네오’는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였다. 이 대작은 이미 후기 오페라와 동급으로 격상돼 극적인 박력이나 드라마 라인은 완벽에 가깝다. 아리아로 인해 곡이 끊어지지 않고 교묘하게 이어지는 작법은 바그너와 베르디 후기 오페라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음악’이었다.
1781년 6월 8일 음악가로는 최초로 자신을 고용한 지배계급에 맞서며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간 모차르트. 곧 엄혹한 사회와 맞닥뜨리게 되지만 아버지와 누나의 반대 속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해에 대박이 터진 ‘후궁 탈출’은 신혼부부의 살림에도 많은 보탬이 되었다. 레슨과 악보 출판료, 대중 콘서트도 중요했지만 모차르트의 야망은 여전히 오페라계의 석권이었다. 빈 정착기에 모차르트가 쏟아놓은 작품의 양과 질은 이전이나 현재까지도, 어떤 작곡가도 이루지 못한 기적이었다. 그저 그의 음악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완성으로 끝난 ‘카이로의 거위’와 ‘속은 신랑’에 이어 1786년 드디어 ‘피가로의 결혼’으로 모차르트는 오페라의 정점을 찍는다. 이른바 ‘다 폰테 3부작’의 큰 형님 격인 ‘피가로의 결혼’에 이어 ‘돈 죠반니’, ‘코지 판 투테’가 3연타석 홈런을 치며 인류 불멸의 걸작이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1600년 오페라의 공식적인 태동 이래 200년 가까이 지속된 ‘레치타티보 - 아리아’의 공식을 깨어지고 무의미한 기교 위주의 기나긴 아리아는 퇴출되었다. 대신 합창과 중창의 비중이 높아지고 곡과 곡 사이는 심리적으로 연결되고 드라마가 개입되었다. 비극과 희극이 하나로 통합되고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등, 기름과 물이 하나로 섞여 용광로에서 맴돌았다. 오페라가 마침내 듣고 보는 재미에 사유(思惟)의 가치까지 부가된 셈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의 자비’는 동시에 작곡되었다. 1791년 9월 6일 프라하 에스타테 극장에서 보헤미아 왕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축하 기념으로 초연된, 행사용 오페라 ‘티토의 자비’는 오페라 세리에의 전형이었다. 이에 반해 9월 30일 빈 비덴 극장에서 모차르트 자신이 지휘한 ‘마술피리’는 36년 짧은 삶을 살다간 천재의 넋이 곳곳에서 너울거리는 불멸의 걸작이다. ‘마술피리’는 어른들의 얄팍한 상술로 방학 때 ‘어린이를 위한 클래식’으로 매년 단골로 올라가는 오페라가 결코 아니다. 자라스트로는 ‘선’, 밤의 여왕은 ‘악’으로 갈라놓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차르트가 250주년 생일을 맞은 200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는 오스트리아 총리를 비롯해 각국 외교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 콘서트가 열렸다. 이때 최고의 모차르트 해석가인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빈 필하모닉과 교향곡 40번을 연주하기 전 유럽 전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장문의 연설을 했다. “올해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와 동일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돈을 벌고 사업과 관련된 것이어서 유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지난 200년이 넘게 우리에게 요구해온 바는 너무나 단순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엄숙히 그리고 주의 깊게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거장의 한마디 한마디가 상업주의에 매몰된 본고장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었고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건 ‘마술피리’로 향했다. 천태만상이 올곧게 결합된 인류의 ‘종합선물세트’ 격인 ‘마술피리’. 아르농쿠르가 일찍이 1986년 취리히 오페라와 작업한 ‘마술피리’는 여성차별과 폭력행사를 당연시하는 자라스트로를 밤의 여왕과 동급의 위선자로 다뤘다. 주인공은 파미나요, 조연은 타미노였다. 어린이가 타락한 어른을 구원하는 플롯이 바로 ‘마술피리’다. 이건 모차르트가 꿈꾸던 이상이었다. 그만큼 ‘마술피리’는 음악과 스토리텔링이 심오하다. 사전 공부가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데아의 세계다.
‘마술피리’를 초연하고 정확히 66일 뒤에 아르농쿠르가 말한 대로 ‘신의 손에 들린 펜대’는 그토록 갈망하던 평등한 세상인 천국으로 올라갔다.
* 연대순으로 정리한 모차르트의 22개 극음악은 다음과 같다. 1790년 공동 작업한 징슈필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K.592a) 까지 더하면 23개가 된다.
‘첫째 계명의 의무’ (Die Schuldigkeit Des Ersten Gebots K.35, 1767년, 종교적 징슈필)
‘아폴로와 히아친투스’ (Apollo et Hyacinthus K.38, 1767년, 라틴어 음악극)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 (Bastien und Bastienne K.50, 1768년, 징슈필)
‘가짜 바보 아가씨’ (La finta semplice K.51, 1768년, 오페라 부파)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Mitridate, Rè di Ponto K.87, 1770년, 오페라 세리아)
‘알바의 아스카니오’ (Ascanio in Alba K.111, 1771년, 페스타 테아트랄레)
‘시피오네의 꿈’ (Il sogno di Scipione K.126, 1772년, 세레나타)
‘루치오 실라’ (Lucio Silla K.135, 1772년 음악 드라마)
‘가짜 정원사’ (La finta giardiniera K.196, 1774년, 드라마 지오코소)
‘양치기 임금님’ (Il Rè Pastore K.208, 1775년, 세레나타)
‘차이데’ (Zaide K.344, 1779년, 미완성 징슈필)
‘이집트 왕, 타모슈’ (Thamos, König in Ägypten K.345, 1773년, 1779년, 극 부수 음악)
‘이도메네오’ (Idomeneo K.366, 1781년, 오페라 세리아)
‘후궁 탈출’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K.384, 1782년, 징슈필)
‘카이로의 거위’ (L'Oca del Cairo K.422, 1784년, 미완성 드라마 지오코소)
‘속은 신랑’ (Lo sposo deluso K.430, 1784년, 미완성 오페라 부파)
‘극장 지배인’ (Der Schauspieldirektor K.486, 1786년, 1막 코미디 징슈필)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K.492, 1786년, 오페라 부파)
‘돈 죠반니’ (Don Giovanni K.527, 1787년, 오페라 부파)
‘코지 판 투테’ (Così fan tutte K.588, 1790년, 오페라 부파)
‘마술피리’ (Die Zauberflöte K.620, 1791년, 징슈필)
‘티토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 K.621, 1791년, 오페라 세리아)
<피가로의 결혼>
동료: 2주 동안 독방에서 지낼만한 가치가 있었나?
앤디: 내겐 식은 죽 먹기였어.
동료: 그게 말이나 되나? 일주일이 1년 같았을 텐데...
앤디: 모차르트가 내 친구가 되어 줬지.
동료: 교도소 측에서 레코드 플레이어를 갖다 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앤디: 모차르트는 나의 머리에도, 그리고 가슴에도 있었어. 그게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이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거든. 너희들은 음악에 대해 그렇게 느껴보지 않았어?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억울하게 종신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인 은행원 출신 앤디는 교도소장의 부정한 돈을 세탁해 준 덕분에 신임을 받는다. 어느 날 앤디는 간수의 방에서 LP레코드를 틀고 교도소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흘려보낸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하늘을 바라보며 음악에 빠져드는 죄수들. 결국 앤디는 2주 동안 독방에 갇히는 벌을 받는다. 그리고 동료들과 첫 식사 자리에서 앤디는 음악이 머리와 가슴 속에 있다고 말한다.
1994년 영화 <쇼생크 탈출>. 중반부에 느닷없이 등장한 음악은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다. 관객 모두가 앤디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그 노래는 바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3막에 나오는 백작부인과 하녀 수산나의 2중창 ‘산들바람 불어와’였다. 일명 ‘편지의 2중창’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곡은 오페라 사상 소프라노 2중창 가운데 단연 최고로 꼽히는 걸작이다.
이때 40년을 복역한 레드의 독백이 함께 들려온다. “나는 두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건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 목소리는 이런 온통 회색으로 뒤덮인 곳에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이 더 높고 더 먼 곳까지 솟구쳐 올랐다. 아름다운 새가 우리의 삭막한 감방으로 들어와 날개를 퍼덕이며 벽들을 부숴버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쇼생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레드의 담담한 음성이 나올 때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도 눈시울을 붉히며 공감했을 터.
모차르트의 무엇이 이토록 앤디에게 감동을 주었을까?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 자신의 이야기다. 1981년 25세의 모차르트는 절대 권력자 콜로레도 대주교의 뜻을 거역하고 엉덩이를 걷어차이면서까지 새장을 탈출해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엄혹한 현실이었다. 몸은 자유를 얻었으되 이제 그는 빵을 위해 작곡을 해야 하는 절박함에 처해야만 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여주인공 수산나가 지배계급인 백작을 이기고 자신을 뜻을 이루게 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오페라였다. 나폴레옹이 오죽하면 프랑스 혁명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을까!
‘피가로의 결혼’의 무대는 17세기 중반 봉건사회의 스페인 세비야다. 따라서 계급질서는 엄격하게 지켜진다. 지배자인 백작이 피지배자인 수산나에게 초야권(初夜權)을 행사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페라는 수산나와 피가로가 저녁에 결혼을 앞둔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백작은 매너리즘에 빠진 결혼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당일 결혼을 앞둔 수산나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수산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치는 백작의 술수를 보기 좋게 제압하고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는다.
‘피가로의 결혼’은 빈에서 1786년 빈에서 8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강제종료였다. 몇 회는 배를 잡고 웃어야 하는 표면적인 스토리에 때문에 아둔한 빈의 귀족과 청중은 열광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이면에 숨겨진 계급타파와 사회모순을 비웃는 혁명적인 모습을 발견하면서 상연 금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모차르트가 그렸던 평등한 사회를 기득권층이 용인할 리 없었다.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프라하로 건너가 히트작이 되었다. 식민지 백성들이 이보다 더 유쾌, 통쾌, 상쾌한 드라마를 접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2세기 만에 ‘레치타티보 세코’(단순하게 쳄발로 등으로 반주하는 대사)가 오케스트라 반주를 동반하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로 대체되면서 아리아와 맞먹는 수준으로 격상된다. 음악적으로 베르디와 바그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막 피가로의 카바티나 ‘나리께서 춤을 추신다면’ 전, 더블베이스가 둔중하게 쳄발로와 최초로 레치타티보 반주를 하다가 마침내 3막, 오케스트라 반주로 백작이 레치타티보를 부를 때 당시 청중이 느꼈을 충격을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가히 오페라는 ‘피가로의 결혼’ 전과 후로 나뉠 만큼 파격적인 변신을 이루게 되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새장을 탈출해 자유로운 곳으로 날아오르려 했던 모차르트가 구체적으로 구현한 세상의 표본은 바로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백작부인이 아니라 하녀 수산나이어야만 했다. 수산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징징대는 하소연 한 번 없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절묘하게 극복해간다. 그녀는 수동적인 당대 사회의 여인상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자신을 컨트롤하며 무려 11명에 달하는 주요 배역 가운데 최상위에서 극을 이끌어간다.
“나리, 왜 놀라십니까? 칼을 빼 들고 불쌍한 하인을 죽이시렵니까?” 2막에서 백작부인은 외간 남자 케루비노와 노닥거리다 백작에게 들켜 급히 옷장으로 숨긴다. 이에 수산나가 케루비노를 도망치게 하고 대신 옷장에 있다가 들이닥친 백작 앞에서 비꼬듯 말할 때 관객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3막에서는 백작부인과 아예 동지가 되어 백작을 유인할 묘책을 함께 강구한다. 바로 ‘편지의 이중창’이다. 이쯤 되면 수산나는 무식한 하녀가 아니라 백작부인을 뛰어넘는 품위와 교양을 갖춘 주류로 격상된다.
철저하게 남성위주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인 수산나가 남성인 백작을 압도하는 오페라. ‘비주류의 주류화’가 거침없이 진행되는 ‘피가로의 결혼’을 모르고 오페라를 논할 수 없으며 나아가 인생을 논할 수도 없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가 인류에게 선사한 축복이자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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