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감상회 일정] 제28회 LP감상회 - I Like 정경화
본문
<제28회 LP감상회 ‘I Like 정경화’>
* 클라라하우스(대전): 2020년 1월 11일(토) 오후 3시
* 해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제28회 LP감상회는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과 함께 합니다.
숱한 명연주 가운데 3장의 음반을 엄선했습니다.
1960년대 말, ‘코리아’가 어딘지도 모르는 그때,
세계무대에 당당히 우뚝 선 정경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클라라하우스의 LP시스템으로 감상하는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마치 실연을 듣는 듯 강렬할 것 같습니다.
은희의 1971년 LP로 듣는 ‘꽃반지 끼고’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는 듯 이승환의 ‘너를 위한 마음’을 LP로 준비했습니다.
보니 타일러의 허스키보이스로 문을 여는 팝은 에어 서플라이의 빌보드 차트 1위 곡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이 뒤따릅니다. 1983년 힛트한 이 두 곡은 마치 남매처럼 비슷한 느낌.
그리고 최근 발매된 퀸의 18LP 전집을 공개합니다. 무려 5년의 리마스터링을 거쳐 탄생한 퀸.
2020년 시작, 클라라하우스 LP감상회는 따뜻한 아날로그로 여러분들에게 위안을 드리겠습니다.
클라라하우스 드림
* 아래 선곡표와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가 월간 객석에 기고한 정경화 선생님의 ‘디스코바이오그라피’ 전문을 붙입니다.
.* 선곡표 *
<클래식 I Like 정경화>
1. Bruch 브루흐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
(정경화 violin/ 루돌프 켐페, 지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2년 LP 초반)
2. Bach 바흐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정경화 violin/ 1975년 LP)
3. Elgar 엘가 - ‘사랑의 인사 Salut D'Amour’
(정경화 violin/ Philip Moll, piano/ 1987년 LP 초반)
4. 드보르자크 – 피아노 3중주
(정경화 violin, 정명화 cello, 정명훈 piano/ 1987년 LP)
<가요>
1. ‘꽃반지 끼고’
(은희/ 1971년 LP)
2. ‘너를 향한 마음’
(이승환/ 1991년 LP)
3. ‘독백’
(혜은이/ 1983년 LP)
<팝, 라틴>
1. 보니 타일러 ‘Total Eclipse of the Heart’
(1983년 LP음반)
2. Air Supply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
(1983년 LP음반)
3. 메르세데스 소사(1935~2009) ‘Gracias a la vida’
(1988년 독일 크산텐 실황 DVD/ 존 바에즈와 함께)
4. 레너드 코헨 ‘Bird on the Wire’
감상1: 1969년 LP 초반
감상2: 2008년 11월 6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 실황(블루레이 영상)
5. Queen ‘Love of My Life’
감상1: 1975년 LP 초반
감상2: 1981년 몬트리올 라이브(블루레이 영상)
6. Queen ‘Under Pressure’
감상1: 1982년 LP (스튜디오 18LP 한정판)
감상2: 1981년 몬트리올 라이브(블루레이 영상)
7. Queen ‘Too Much Love will kill You’
(1995년 LP / 스튜디오 18LP 한정판)
8. 아바 ‘Dancing Queen’
(1976년 7인치 싱글LP)
객석 2012년 10월호
디스코바이오그라피5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1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4악장의 마지막 음이 불꽃으로 타오르며 연주회의 막이 내렸다. 막내아들은 갑자기 붉디붉은 장미꽃 한다발을 들고 무대를 내려와 객석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 부둥켜안았다. 얼마 전 다리를 다쳐 거동조차 힘든,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아들에게 안겨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때까지 드문드문 기립박수를 보내던 청중은 마침내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대 위에 있던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남동생과 어머니를 맞으며 서로를 감쌌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2004년 9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정트리오가 평생을 자신들을 위해 헌신한 86세 어머니께 바친 공연은 1958년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가족음악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트리오로서도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필자는 이날 공연 전 정트리오의 세 멤버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뿐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까지 한꺼번에 인터뷰하는 행운을 맛봤다.
“감개무량합니다. 경화가 며칠 전에 그러더군요. 나이 50세까지는 어머니 말에 무조건 순종했으니까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구요. 특별히 제가 한 것이 없어요. 아이들이 제 말을 너무 잘 들었으니까요.”
지난해 타계한 고 이원숙 여사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방식대로 모든 공을 자식들에게 돌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이러한 가족의 사랑을 가장 잘 구현한 곡은 다름 아닌 브람스의 첫 작품인 피아노 트리오 1번이었다. 브람스가 클라라의 집에서 초연한 사랑노래는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思母曲)으로 화하며 감동을 더했다. 1987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녹음된 음반에서 들었던 같은 곡의 은은하고 정갈한 느낌은 실연에서 더한 원숙미를 풍겼다. (DECCA 421 4252) 이후 정트리오는 2011년 5월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 12월 13일 이화여대강당에서의 추모공연으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정경화! 1970년대와 80년대, 그 이름은 대한민국 클래식 연주자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다. 1984년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지방 소도시에 살았다. 그때 시청 앞에 있던 작은 레코드 가게는 가요와 팝음악 일색이었지만 한 귀퉁이에 클래식 코너가 있었다. 그해 가을로 기억된다. 매번 목록이 똑같은 ‘팝송판’ 고르기에 지친 필자에게 한 여인의 얼굴 옆모습이 음반재킷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LP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영어 고딕체로 ‘KYUNG-HWA CHUNG'을 먼저 읽을 수 있었고 나머지 작곡가와 곡명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정경화, 음악선생님께 얼핏 들은 이름이었다. 바로 옆자리에는 얼핏 촌스럽게 느껴지는, 야외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노랑, 분홍 꽃가지에 둘러싸인 정경화의 상반신이 표지로 보이는 음반이 하나 더 있었다. 이무지치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와 카라얀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 ’운명‘ 정도가 클래식라이브러리의 전부였던 당시, 두꺼운 참고서 세권을 살 수 있는 거금을 지불하고 정경화를 2장의 LP로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먼저 ‘꽃처녀’ 정경화의 음반부터 턴테이블에 걸었다. 라이센스 LP 뒤에 한글로 적힌 곡 제목 ‘파르티타 제2번’은 무슨 암호 같았다. 도무지 이해불가의 음악 감상은 채 5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결국 정경화와의 첫 데이트는 10년의 세월이 지나 대학 졸업하는 해에 이르러 바흐의 근원을 파헤칠 때 비로소 밤새 눈물로 지새우며 재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반주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이 커플링된 이 음반은 1974년 26세의 꽃다운 정경화가 최초로 도전한 바흐 녹음이었다. 놀랍다! 20대 젊은 여인이 연주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열한 정신과 초절기교는 ‘샤콘느’에서 찬연히 타오른다. 소나타 3번의 ‘라르고’는 가장 천천히 연주한 시게티보다도 10초가 느리고 하이페츠의 광속 활긋기와는 무려 1분 이상 차이가 난다. 오죽하면 음악평론가 이순열이 ‘정(靜)으로의 변용’라고 표현했을까. 질풍노도의 시기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고 안으로 침잠하는 절제를 일찌감치 터득한 정경화의 무반주는 그래서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그 겸손은 나이 60이 넘어 전곡 연주에 도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했다. 올해 드디어 정경화는 국내 무대에서 거울 앞에 돌아와 선 누이의 심정으로 바흐 무반주 시리즈를 진행했으니... (DECCA SXL 6721)
하지만 브루흐는 달랐다. 작곡가가 누구인지 곡이 어떤 내용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도 들을 만했다. 시원시원하게 크게 보이는 옆모습만큼이나 음악은 질주했다. 바흐에 실패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3악장까지 한 번에 달려갔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마치 굶주린 암사자같이 달려들다가도 어느새 청명한 사슴의 눈동자가 비쳐지는 야누스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1악장에서 악구 시작점의 ‘어택’은 헤비메틀 음악만큼이나 강력했으며, 2악장의 동양적인 냄새는 한국 여인의 가녀린 심성과 너무도 닮아 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후의 쉼이 거기 있다. 1972년 발매된 정경화의 두 번째 음반은 필자에게 평생을 함께 안고 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LP 소리골이 닳을 대로 닳아 같은 음반을 다시 구해 들어야 했다. 수없이 많은 브루흐의 협주곡 명반 가운데 당연히 정경화가 가장 높은 곳에 있음은 물론이다. (DECCA SXL 6573)
이렇게 시작된 정경화 사랑은 당연히 1970년에 녹음한 데뷔음반으로 향했고 시벨리우스의 협주곡 또한 정경화를 통해 첫 경험을 맛봤다. (DECCA SXL 6493) 아! 1악장 도입부에서 번져오는 북구의 서늘한 기운은 소름을 돋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이런 처연한 음색을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으며, 언제나 무대에서 쓰러져서 나온다는 각오로 올라가고, 100번이 아니라 1만 번을 태어나도 다시 하고 싶을 만큼 바이올린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벗’ 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경화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표정들이 갑론을박하며 벌이는 그녀의 바이올린은 참으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불과 22세의,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인에게 이토록 강인하고 섬세한 음악혼이 꿈틀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시벨리우스와 함께 담긴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은 다소 육즙이 빠져 허한 느낌이라는 게 중론이다. 정경화는 11년 뒤 지휘자와 악단을 바꿔 샤를 뒤트와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시 한 번 차이콥스키에 도전했다. 앞선 녹음이 화려한 외관을 강조하는 ‘수(秀)’의 세계라면 후자는 농익을 대로 농익어 자신을 뒤로하고 음악을 앞으로 내세우는 ‘은(隱)’의 경지에 도달한 형국이다. 두터운 질감은 압권이다. (DECCA SXDL 7558)
“적당히 편안히 하거나 타협해서는 결코 살아 있는 연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연주자는 홀로 씨름하면서 울고 웃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정경화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이 말은 어린 시절 일찌감치 터득한 자신만의 신조였다. 1948년 3월 26일 정경화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플루트를 전공한 큰언니 명소와 첼로를 공부하는 작은언니 명화에 이어 자연스럽게 그녀는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며 7명의 자녀들은 자의든 타의든 음악을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자식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으로 가는 피난길에 어머니는 피아노를 짐 속에 실었다. 이러한 지극정성 속에 ‘냉면집 딸들’은 승승장구했다. 9세에 서울시향과 협연한 정경화는 열 살이 넘으면서 국내에서 이미 경쟁자가 없을 만큼 천재를 드러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이화여대강당에서 공연하던 미국 악단의 중간휴식 시간에 깜짝 출연한 정경화의 연주를 눈여겨 본 단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여기저기에 소개한 뒤 직접 초청을 하기에 이른 것. 마침내 정경화는 1960년 언니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이반 갈라미언 교수의 제자로 들어가기까지, 아니 그 후로도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자신을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가족은 2년 뒤인 1962년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로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장기체류 비자를 받기 위해 남동생 셋도 그럴듯한 콩쿠르 우승 트로피를 받아야만 했다. 거기엔 정명훈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가족은 시애틀에 짐을 풀고 마침 시애틀 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대회장에 식당을 열었다. 살 길이 막막하던 가족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박람회가 끝난 뒤에는 시애틀대학 근처로 옮겨 오픈했다. 이역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족은 죽기 살기로 일해야 했다. 하루 20시간씩 노동했다. 정명훈은 식당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거장의 요리솜씨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또한 정명훈은 이때 제이콥슨 여사를 만나 피아노 수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정경화도 뉴욕에서 시애틀로 올 때면 집안일을 도왔다. 시애틀은 이들에게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시장까지 나서서 시민 600명의 서명을 받아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트리오는 시애틀에서 자주 연주회를 열었고, 전문 연주자로 자리 잡은 후에도 정경화는 제라르 슈워츠가 지휘하는 시애틀 심포니와 기꺼이 협연무대를 가졌다.
1967년 정경화는 아이작 스턴, 이착 펄먼 등 유태계가 주름잡고 있는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역시 유태인인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이 콧대 높은 경연장에서 작은 동양인 소녀가 우승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콩쿠르 우승 후 정경화의 귀국 행사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 가는 성황을 이뤘다. 청와대 초청은 당연한 것이었고 가난에 지친 조국은 그녀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1968년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미국 순회 공연에 돌입했다. 19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유럽 데뷔 무대를 가졌는데 차이콥스키 협주곡에서 리허설 당일 멘델스존 협주곡으로 곡을 바꿔버렸다. 정경화는 사전예고도 없는 무례한 악단에 맞서 아무렇지도 않게 리허설을 마쳤다. 그제야 런던 심포니 단원들은 그녀를 진정한 연주자로 인정하고 데뷔 음반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데카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것도 이때였다. 1969년에는 닉슨 대통령이 독일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에 정경화를 백악관에 초청했다. 양국 정상 앞에서 약관 20세의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는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때부터 정경화는 매년 120회 이상의 연주를 소화하며 음반 녹음도 병행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1975년 런던 킹스웨이홀에서 녹음한 생상스의 협주곡 3번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 곡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강인함과 애절함, 동시에 단아한 여성미까지 겸비한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여기에 완벽한 기교까지 덧입혀 최상의 연주를 구축했다. 2악장 플루트와 대화하는 바이올린의 슬픈 노래는 눈물마저 마르게 한다.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맞서는 그녀의 솜씨는 골리앗과 대적하는 다윗의 형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프레이징과 날카로움은 이내 내면에서 우러나는 여인의 향기와 결합해 팔색조의 날개짓을 보여준다. 로렌스 포스터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또한 안정적인 뒷받침으로 조력한다. 생상스의 음악이 이토록 격정적이었던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절대명연이 여기에 있다. (DECCA SXL 6759) 이같은 정경화의 다이내믹하고 온화한, 절묘한 이중성은 엘가의 협주곡(DECCA SXL 6842)과 1980년에 발매된 베토벤의 협주곡(DECCA SXDL 7508)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데카 시절 정경화의 실내악 음반은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라두 루푸의 피아노에 실리는 그녀의 감탄할만한 해석은 이 난곡을 고아한 한편의 시로 승화시켰다. 펭귄가이드에서 로제트 표지를 받을 만큼 완벽한 연주는 어지간해서는 감동받기 힘든 프랑크의 장엄한 소나타를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니면서 열락의 순간으로 인도해간다. 이 곡에 관한한 다른 음반을 목록에 추가할 필요가 없는 지존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DECCA SXL 6944)
1984년 정경화는 영국인 제프리 리게티와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결혼한 이듬해 발매한 최초의 소품집 ‘콘 아모레’는 사랑하는 남편이 타이틀을 지어준 매력만점의 명작이자 사랑노래다. 정경화의 음반 가운데 가장 많은 18만장을 팔아치운 스테디셀러다. 대중음악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이 판매량은 실로 어마어마한,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다. 국내에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처음 소개해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 3분여의 짧은 곡에 무려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쏟아 부으며 절치부심했다고 하니 그 프로정신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쉬어가는 소품집에 이토록 치열한 음악성으로 무장한 채 우리 곁으로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곡 한곡이 거대한 교향곡의 맞먹는 흡인력으로 듣는 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DECCA 417 289-2)
데뷔 음반에서부터 정트리오의 1987년 브람스 트리오 음반에 이르기까지, 정경화의 데카시절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완벽함이 모든 연주에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음악가는 어릴 때는 자신을 위해 살고 젊어서는 청중을 위해 살고, 보다 더 나이가 들면 신을 위해 산다고 말하는 정경화. 그녀는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 아시아 변방의 나라와 여성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동시 극복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우리의 절친한 음악친구였다.
객석 2012년 11월호
디스코바이오그라피6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2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2005년 9월 23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마린스키 오페라에 의한 아시아 최초로 바그너의 ‘링’시리즈 공연 하루 전날,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 공연도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날의 협연자는 정경화. 주최측은 ‘두 거장의 역사적인 만남’이라는 거창한 카피를 내세우며 공연 띄우기에 한창이었다. 먼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이 극히 러시아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연주되었다. 모두들 정경화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기예프가 다시 등장하더니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건너뛰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먼저 연주하기 시작했다. 객석은 어리둥절했다. 필자를 포함 대부분의 청중은 정경화가 들려주는 브루흐 협주곡을 손꼽아 기다려왔을 터. 정경화와 지휘자 루돌프 켐페, 로열 필하모닉의 합작품인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72년에 발매돼 33년 동안 국내 클래식 애호가인의 필수 음반 아이템이었다. 정경화가 데카 시절과 EMI 시절 같은 작품을 두 레이블에 각각 레코딩한 경우는 베토벤과 브루흐 뿐이었다. 그만큼 정경화는 브루흐에 강했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이기도 했다.
게르기예프는 정경화를 기다리는 청중에게 미안했던지 앙코르를 무려 세 곡이나 쏟아 부으며 어느새 2시간을 훌쩍 넘겨 9시 40분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정경화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1734년 산 명기 과르네리 델 제수가 들려있지 않았다. 대신 마이크를 들고, 왼손에 통증이 와 마취주사를 맞았음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최상의 연주를 할 수 없다며 간곡히 사과의 말을 전했다. 뒤돌아서서 퇴장하는 정경화의 그 자신만만하던 어깨가 그때만큼은 천근만근의 바위에 눌려 있는 듯 보였다. 허탈했다. 그토록 갈망했던 브루흐 협주곡 실연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필자는 허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브루흐를 플레이어에 걸었다. 1990년 64세의 노장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런던 필하모닉을 이끌고 녹음한 정경화의 두 번째 브루흐 음반이었다. 불혹을 넘긴 정경화의 녹록한 바이올린이 불을 뿜었다. 2악장의 지긋한 노래는 결혼 후 두 아이의 어머니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그녀의 여유와 다정함마저 묻어나왔다. 실로! 언제 들어도 명반 중의 명반이었다(EMI 6 36121 2). 브루흐보다 1년 전,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베토벤의 협주곡 또한 데카 시절 콘드라신의 빈 필하모닉의 연주에 비해 날선 맛은 무뎌졌으되 크라이슬러의 카덴차를 사용하는 정경화의 음악성은 더욱 고고하다. 같은 음반에서 덤으로 누리는 행복이다.
사실 정경화는 이 공연을 앞두고 뉴욕 집에서 요리를 하다 오른손가락 끝을 베이기도 했다. 그리고 왼손 검지의 부상 후유증은 두 배로 엄습했다. 당시 5일 뒤인 9월 28일 브람스의 협주곡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경화의 브람스는 또 어떤가? 2001년에야 음반을 발매할 정도로 그녀는 브람스를 오래도록 고이 품고 절치부심하며 내공을 키워왔다. 이는 나이 40이 넘어서야 교향곡 1번을 발표한 브람스의 지독한 담금질과 맞닿아 있다. 결국 걸작으로 세상에 나온 브람스의 교향곡처럼 정경화의 브람스 협주곡도 티끌 한 점 범접할 수 없는 최상의 해석을 보여준다. 예전 정경화의 연주는 빠른 악장부터 손이 갔으나 1990년 이후부터는 느린 악장에 먼저 귀 기울여진다. 테크닉으로 거의 결정지을 수 있는 과도한 템포보다 ‘아다지오’에서 보여주는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평생을 두고 속삭였던 사랑의 밀어마저 들려준다. 그리고 이내 감내하며 기다리는 우리 ‘한’의 느낌까지 덧칠하는 수완을 곁들였다. 함께 커플링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은 컴퓨터처럼 정확히 자로 잰 듯한 해석을 보여주는 ‘사이먼 래틀식 베토벤’에 머물렀다. 이 레코딩의 수훈감은 교향곡보다는 협주곡을 연주한 정경화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이다(EMI 6 36121 2). 정경화의 브람스 실연은 5년이 흘러 결실을 맺었다. 2010년 5월 4일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가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무대는 5년만의 첫 복귀이기도 했다.
5년의 세월은 정경화에게 고난의 연속이었을까? 아니다. 폭주기관차처럼 숨 가쁘게 달려온 그녀에게 그 시간은 가족과 함께 인간 냄새나는 삶을 반추하는 쉼이었다. 어려울 때면 언제고 어디서고 곁에 있어준 어머니와 꿈같은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아들 재곤과 유진은 성인이 되었다. 올해 3월 정경화는 폴란드 며느리를 보았다. 28년 전 자신이 결혼했던 영국의 교회에서 큰아들을 장가보내게 된 것. 아픈 일도 있었다. 뉴욕 유학 시절 정경화를 먹이고 재웠던 큰 언니가 2007년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에겐 제 2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같은 해에 데뷔음반부터 정경화 연주 인생의 동반자였던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레이번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정경화는 이 소중한 두 은인을 위해 음악으로 보답할 수 없었다. 그저 기도로 두 사람을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빌 뿐이었다. 왜냐하면 정경화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것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더욱 성숙하고 음악의 내면을 다듬는 것으로 승화시켰으니까. 2008년에는 정경화 재단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젊은 연주자 돕기에 나섰다.
정경화에게 빛나는 연주자로서의 삶은 겉보기에 화려할 뿐이었다. 그 성공을 이루고 또 지켜가기 위해 끝없는 연습을 감당하고,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더욱 버거운 과정이었다. 7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정경화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자식 뒷바라지하기에 늘 모자랐다. 이러한 대가족 속에서 자연스레 부모형제의 진한 사랑을 느끼며 자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경화는 언니 뿐 아니라 늘 자신의 세 남동생 명철, 명훈, 명규에게 미안했다. 특히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명철, 명규에게는,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가 그랬듯이 애틋하고 마음이 아팠다. 막내 명규는 2004년 미국 필라델피아주 최고의 닥터로 선정될 만큼 명망 있는 의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바로 아래 동생 명철은 뒤늦게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있으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1999년 겨울 가족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잠을 자던 중 하늘나라로 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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