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일정]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2020년 1분기 강의일정
본문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2020년 1분기 강의 일정>
2020년 클래식 음악계의 화두는 단연 베토벤입니다.
탄생 250주년을 맞은 베토벤은 세계 공연무대에서 가장 많이 소개될 작곡가입니다.
‘음악이야기’에서는 방대한 베토벤 음악을 연대순으로 압축해 삶과 음악을 따라갑니다.
본 시절과 빈 시절로 나누어 베토벤의 음악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현지 취재한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애호가와 입문자 모두에게 유익한 내용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베르디와 푸치니에 집중했던 유음의 오페라는 이제 러시아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강사가 수십차례 방문했던 러시아, 그리고 그곳의 오페라. 분명 서유럽 오페라와는 다르고 러시아만의 무엇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린스키 극장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마린스키극장에서 발매된 차이콥스키의 ‘마제파’를 감상할 때 우리는 이국적인 정취에 푹 빠져들 것입니다.
모차르트 교향곡 35번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혁명을 이뤘던 ‘시민음악가’ 모차르트가 빈에서 최초로 발표한 대작입니다. 가장 강력한 한 방이 여기에 있습니다.
브람스 피아노 3중주는 클라라와 뒤셀도르프에서 처음 만난 브람스의 첫 작품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클라라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 음악으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최고의 명연주로 선곡합니다.
새해를 맞아 신설한 코너 ‘거장의 숨결’. 지난해 12월에 타계한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의 인생을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그의 선배 예프게니 므라빈스키는 더 그렇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휘학파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며 두 거장의 숨결이 밴 자택과 묘지, 음악원을 스펙트럼처럼 따라갑니다. 명연주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대전 <클라라하우스>
- 매주 수요일 7:30PM (문의: 042-861-5999)
<강의일정>
개강 공개강좌 1월 9일 * 러시아 오페라 입문 ⓵
- 광활한 대자연, 낭만과 서정, 푸쉬킨의 문학
러시아 오페라와 서유럽 오페라, 근원과 배경
1월 16일 * 러시아 오페라 입문 ⓶
- 글린카,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차이콥스키의 교회음악, 교향곡과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
(러시아 오페라에 결정적 영감을 제공한 푸쉬킨,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푸쉬킨 시, 2003년 1월)
1월 23일 설 연휴 휴강
1월 30일 *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하프너’
-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 1호’ 모차르트가 빈에서 쏘아올린 첫 신호탄
- 클라리넷, 오케스트라 안으로 들어가다!
- 생계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강력한 한 방
2월 6일 * 베토벤 탄생 250주년, 삶과 음악 (1770~1792)
탄생과 어린 시절, 빈 유학 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관계
본, 베토벤 생가를 가다
2월 13일 * 베토벤 탄생 250주년, 삶과 음악 (1793~1802)
- 1기: 모방의 시기 (Imitation)
- 적응기과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2월 20일 * 베토벤 영화와 불멸의 연인
영화 ‘불멸의 연인’과 베토벤의 여인들
- 영화 ‘카핑 베토벤’과 후기 현악 사중주
2월 27일 * 베토벤 탄생 250주년, 삶과 음악 (1803~1816)
- 2기: 외향화 시기 (Externalization)
- ‘영웅’ 교향곡에서 ‘대공 트리오’, ‘멀리 있는 연인에게’
3월 5일 * 베토벤 탄생 250주년, 삶과 음악 (1817~1827)
- 3기: 내면화 시기 (Reflection)
교향곡 9번과 후기 현악 사중주, 후기 피아노 소나타
3월 12일 * 거장의 숨결 –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50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밀월관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거장의 자취
3월 19일 * 거장의 숨결 – 마리스 얀손스
라트비아 리가,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계로
러시아와 서유럽 지휘 스타일을 접목한 인간적인 음악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에 있는 므라빈스키의 자택과 미망인 아빌란다 여사,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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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강료: 연간회원(100만원, 등록일로부터 1년), 3개월 정기회원(30만원, 등록일로부터 3개월 10회)
* 멤버십 혜택: 포니정홀 타 강좌, 공연, 입장료 상시 할인
* 청강료: 35,000원 (1회에 한함)
* 커피, 차, 생수, 음료, 다과 제공
* 주차: 클라라하우스 앞 공영주차장 3시간 기준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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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아노음악 2020년 1월호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프로그램 노트)
<베토벤의 삶과 음악>
글.사진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클라라하우스 대표
“나는 예술을 오직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만을 위해서 창조할 작정이오.”
(게르하르트 폰 베겔러에게 쓴 편지 중에서)
베토벤은 철저히 ‘인간’이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언제나 비상(飛上)하기를 원했다. 세상에 군림하는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인간애’의 구현을 위해 날아올랐던 것이다. 바흐가 저 천상에서 조화로운 음의 향연을 구현했다면 베토벤은 인간들 속에서 처절하게 부대끼면서 끝내 한줄기 빛을 찾아 천국에 이르고자 했다.
독일 라인 강변의 도시 본(Bonn)의 본가세 515번지. 1770년 12월 15일 혹은 16일에 베토벤은 세 들어 살던 2층집에서 태어났다. 17일 세례 받은 날만 정확할 뿐 베토벤 자신도 자신의 생일을 몰랐다. 베토벤과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벨기에서 태어나 20살에 본으로 와 정착했다. 쾰른 선제후의 궁정악단 악장과 베이스 가수로 일하며 낳은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요한이었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또한 본 궁정 테너가수였는데, 선제후의 하인과 결혼했다 사별한 젊은 미망인 마리아 막달레나 케페리히와 1767년 결혼했다.
베토벤 집안은 손이 귀했다. 요한과 마리아 사이에서 모두 7명이 태어났으나 베토벤과 두 동생 카스파와 요한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을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신동으로 키우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켰고 이는 베토벤의 자아를 형성하는데 대단히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8살에 베토벤은 쾰른에서 대중 앞에서 첫 공개연주회를 가지게 된다.
10대 초반 베토벤은 크리스티안 네페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눈 뜨게 된다. 계몽주의자 네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와 음악 뿐 아니라 문학, 정치, 프리메이슨에 이르는 사상까지 베토벤에게 가르쳤다. 베토벤의 절대적인 휴머니즘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통해 네페에게 대위법을 배운 베토벤은 향후 많은 작품에서 바흐의 숨결을 온전히 녹여 넣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해, 베토벤은 본 대학에서 칸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베토벤 음악의 인문학적인 모든 용광로는 이미 10대에 형성되었다.
아버지 요한의 술주정은 날로 심해졌고 베토벤은 이미 가장 역할을 감당하며 궁정에서 일해야만 했다. 새로 온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베토벤을 아꼈다. 1787년 베토벤은 선제후의 도움으로 빈으로 떠났다. 빈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모차르트와의 만남이었다. 오페라 ‘돈 죠반니’ 작곡을 하고 있던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돈 죠반니’ 주제를 주고 즉흥곡을 연주하게 했다. 듣고 있던 모차르트가 “이 청년은 장차 세상을 향해 큰 소리를 지를 것이다!” 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소리칠 때 베토벤은 일생일대의 감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베토벤의 음악이 자신의 ‘영원한 멘토’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았는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돈 죠반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시작일 뿐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황제’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주놈’과 형식과 내용면에서 거의 같다. 교향곡 1번부터 등장하는 클라리넷은 모차르트가 교향곡 31번 ‘파리’에서 인류 최초로 사용한 악기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악기’ 클라리넷을 자신의 교향곡에서 ‘메인 악기’로 편입시켜 완벽하게 사용했다. 다(多)주제 형식, 단조 교향곡, 반음계적 진행 등 모차르트가 시도했던 모든 것들이 베토벤에 이르러 비로소 완결을 보게 된다.
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탈출해 인류 최초로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원대한 프리랜서 음악가의 선구자였으되 결실을 맺지 못하고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은 그러나 모차르트가 다져놓은 혁명가의 길을 완성했다. 그는 귀족과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음악을 쓰며 대우 받으며 산 최초의 음악가였다. 모차르트 평생의 한을 푼 것이나 다름없다.
1792년 11월 베토벤은 본을 떠나 빈으로 향했다. 하이든의 제자가 되었으나 베토벤과 맞지 않았다.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작곡보다는 피아노 연주로 먼저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유달리 피아노가 포함된 곡이 많다. 1795년 3월 29일 베토벤은 자신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했다. 빈의 첫 데뷔연주회였다. 그리고 1800년 마침내 빈 궁정극장에서 직접 콘서트를 지휘했다. 피아노 협주곡과 7중주, 피아노 즉흥연주, 교향곡 1번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베토벤의 작곡활동은 3개의 다른 시기로 나뉜다. 초기, 중기, 후기가 그것인데 각 각 음악적 수준과 내용, 형식이 완전히 차별화된다. 이를 토대로 프랑스 작곡가 뱅상 당디(Vincent D‘Indy)는 베토벤의 작품 세계를 3단계로 구분했다. 1기 ’모방의 시기(Imitation, 1793~1802)‘는 선배 작곡가들에게 배우는 수련기 혹은 적응기였다. 하지만 초기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비창‘과 ’월광‘을 들어보라. 교향곡 1번과 2번도 마찬가지다. 하이든에게서 나타나는 단조로운 형식미와 달리 번뜩이는 개성이 곳곳에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10년이 지난 뒤였다. 세상은 변했다. 그의 머리 속은 늘 모차르트처럼 격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기존 인습과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이는 음악에서 다이내미즘을 극대화시켰다. 스캐일은 급격히 팽창했다. 2기로 가기 위한 모든 준비는 이미 1기 ’모방의 시기‘에서 끝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베토벤의 육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1797년 베토벤은 티푸스를 앓고 난 뒤 조금씩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경력에 치명타가 될 것을 두려워한 베토벤은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자살까지 시도한 베토벤은 1802년 빈 교외의 전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7개월을 머무르며 이른바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 일컬어지는 편지를 두 동생에게 쓰게 된다. 작곡가에게 들을 수 없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베토벤은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이 고난을 극복했다. 1802년 10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와 새 작품 작곡에 착수한다. 그의 대화록을 보면 1818년부터 베토벤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2기는 ‘외향화 시기(Externalization, 1803~1816)’로 교향곡 3번에서 8번,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하는 때다. 충만한 시대정신(Zeitgeist)으로 무장한 베토벤의, 베토벤에 의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위대한 작품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던 ‘외향화’. 이때서야 비로소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로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고전주의가 베토벤으로 연결되며 ‘영웅’ 교향곡으로 정점을 찍게 되는 것이다.
1994년에 개봉했던 베토벤의 삶을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영화 전반부, 베토벤이 사랑하는 귀차르디의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한 무리의 귀족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배경으로 흐르는 ‘영웅 교향곡’ 1악장 도입부는 압권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비켜야 해. 이제 귀족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내가 어렸을 때는 이런 말만 해도 체포되었지. 하지만 지금은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겁먹고 있지. 왜 가발 유행이 끝난 줄 알아? 왜냐하면 모두 단두대의 제물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모두 나폴레옹을 두려워하고 있어. 내 교향곡의 주제가 바로 나폴레옹이라고.” 베토벤이 귀차르디에게 하는 이 대사야말로 ‘영웅 교향곡’의 정수이자 베토벤의 정의로움과 모차르트와 함께 평등사회를 꿈꿨던 원대한 꿈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교향곡 3번은 그래서 기존 교향곡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엄청난 길이와 확대된 악기 편성으로 ‘영웅’과 ‘혁명’을 올곧게 표출한다. 우선 혼이 3개로 늘어나면서 현악기도 증가해 풍성한 음향효과가 가능해졌다. 여기에 음악사상 최초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2부로 갈라져 각자의 선율을 진행한다. 그동안 첼로의 저음보강용으로 쓰였던 콘트라베이스가 독자 행보를 하면서 저음부의 질감이 월등히 두툼해졌다. 또한 모차르트가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에 도입했던 클라리넷은 베토벤에 이르러 이제 드디어 오보에와 플루트와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돼 목관악가의 중심으로 도약했다. ‘비주류 악기’가 ‘주류 악기’로 바뀐 것이다.
음악평론가 이순열은 이렇게 말했다. “청각을 잃은 불우한 음악가는 ‘영웅 교향곡’을 기점으로 참으로 깊은 정신적인 개안(開眼)을 통해서 더욱 아름다운 음률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더욱 힘차고 더욱 활기에 넘친, 어떤 소음으로도 지울 수 없는 찬란한 화음을 구축하고, 밝은 햇빛과도 같이 청량한 광명이 펼쳐지는 음률의 화원을 설계해 갔다.”
‘외향화 시기’는 베토벤만이 쓸 수 있는 작품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9개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크로이체르’를 끝으로 완결되었고 피아노 소나타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약진했다.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25번 ‘고별’! 얼마나 많은 발전이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알게 된다. 1805년 1월 30일자 ‘비너 자이퉁’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베토벤은 이제 하이든, 모차르트와 어깨를 겨루는 음악가가 되었다.”
1806년에는 중기 현악사중주의 대명사인 ‘라주모프스키’ 사중주가 세상에 태어났고 교향곡 4번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작곡되었다. 그리고 2년 뒤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을 동시에 발표한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지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로 맞섰다. 1812년 나폴레옹이 패하자 베토벤은 교향곡 7번과 8번으로 그 기쁨을 노래한다. 이듬해에는 ‘웰링턴의 승리’도 썼다. 빈 회의를 거치며 왈츠가 빈을 중심으로 유럽에 급속도로 퍼져갔다. 빈 회의 후 빈에 수많은 사생아가 태어나게 했던 불순한 왈츠. 베토벤은 이러한 왈츠를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야 할 음악’이라며 분기탱천했다. 격랑의 시대에 베토벤은 음악으로 싸우고 투쟁했던 것이다.
“숙명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깊은 고뇌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들의 사랑은 희생과 단념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을 것인지.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나는 그대를, 그대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대의 성실한 루트비히. 불멸의 연인에게 7월 6일 아침”
1812년 7월에 베토벤이 쓴 일련의 사랑 편지 가운데 하나다. 영화 ‘불멸의 연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베토벤의 사랑. 이 기막힌 사연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다만 음악학자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불멸의 연인은 정의한다. 쉰틀러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줄리에타 귀차르디를, 토마스 산 갈리는 베를린의 소프라노가수 아말리 제발트를, 로망 롤랑은 테레제 부룬스빅을, 라 마라는 테레제의 동생 요세피네를 지목하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들 여인으로 인해 그의 음악이 풍성해지고 성숙해졌음은 분명하다.
마리아 에르되디 백작부인(1779~1837)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베토벤을 극진히 보살폈다. 베토벤은 그녀을 위해 피아노 트리오 3번 ‘유령’을 헌정했다. ‘고난을 뚫고 환희에로!’(Durch Leiden zu Freude)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에르되디 백작부인에게 보낸 서신 중에 쓴 이 말은 베토벤이 평생을 두고 지켜가야 했던 이상이자 궁극이었다. 세상의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쓴 그의 음악은 일파만파의 광배(光背)효과를 발휘하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안식과 평화를 제공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질주하는 슬픔’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침잠하는 슬픔’이다. 한음 한음에 의미를 두고 거기에 삶의 모습을 투영해 깊이 가라앉혀 버리는... 그래서 결국에는 이내 환희로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다. 당시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결코 귀족에게 굽힘이 없었던 베토벤을 생각해 보면 음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은 어렴풋한 암시가 아니라 언제나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로 결론 지어지는, 붉은 선혈처럼 뚜렷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3기는 ‘내면화 시기(Reflection, 1817~1827)’다. 세상의 소리를 일체 들을 수 없는 베토벤이 자신에게 들려오는 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감당하는 이 불가사의한 10년은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불멸의 걸작들을 선사했다. 소위 ‘후기(late)’로 일컬어지는 5개의 피아노 소나타, 5개의 현악 사중주는 이미 인간의 음악이 아니다. 여기에 교회음악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 ‘마태수난곡’과 견주는 베토벤의 ‘신약성서’, 즉 ‘장엄미사’는 고대에서 당시에 이르는 모든 음악양식이 집약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그리고 최후의 교향곡 9번 ‘합창’은 더 이상 거론하면 무엇하랴.
1815년 11월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카스파는 형 베토벤을 일찌감치 아들 카를의 후견인으로 지목했다. 동생이 죽고 베토벤은 카를을 엄마에게서 떼어놓으려고 4년 동안이나 법정공방을 하며 심신을 소모시켰다. 마침내 1820년 4월 법원에서 베토벤의 손을 들어주기까지 베토벤이 기울인 집착과 정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베토벤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이 와중에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의 음악은 이제 더욱 더 가라앉았다. 첼로 소나타는 첼로를 완전한 독주악기의 반열로 올려놓았고, 여러 개의 가곡이 묶여 하나를 이루는 연가곡집은 ‘멀리 있는 연인에게’로 시작을 알렸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는 아직까지도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피아노 작품으로 꼽힌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완벽하다. 이 ‘난공불락’은 1836년 리스트가 정복하기까지 18년 동안 아무도 연주할 수 없었다.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아리에타’ 악장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이 더 이상 아니다. 신이 베토벤을 통해 인류에게 선사한 축복과도 같다.
베토벤은 가장 큰 규모의 피아노 소나타인 ‘함머 클라이버’에서도 푸가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교향곡 9번의 피날레 악장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바흐에 의해 촉발된 푸가! 이후 모든 후배 작곡가들의 모범이자 따라야할 규범이 되었던 ‘대 바흐’는 베토벤에게는 비켜갈 수 없는 숙명적인 굴레와도 같은 것이었다. 음악의 시작과 끝인 바흐에게 어릴 때부터 경도된 베토벤으로서는 ‘대 푸가’를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악 사중주 12번의 마지막 악장에서 분리된 ‘대 푸가’는 바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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