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일정] 제주클라라하우스 1.5(금) & 1.6(토) 라흐마니노프 특집
본문
<제주클라라하우스 1월 강의 일정>
* 2024. 1.5(금) 7:00PM, 1.6(토) 4:00PM
*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평화5길 53-2(파랑카페)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3번
* 강의: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 예약문의: 010-2107-7446
* 강의안내:
2023년 영국 클래식FM '명예의전당' 투표 1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한국인의 감성에 잘 어울리는 러시아의 낭만과 서정.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번, 3번을 작곡한 러시아 남부 이바노프카의 별장은 그에게 안식처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사촌에서 나중에 부인으로 바뀐 나탈리아를 만났고 망명 전 작곡가의 거의 모든 작품이 탄생했다.
망명 후 스위스 루체른에 먼저 안착한 라흐마니노프는 ‘빌라 세나르(Villa Senar)’로 명명한 루체른 호수가의 집을 사들였다.
강사가 현지 취재한 ‘빌라 세나르’와 이바노프카.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정수는 러시아 정교회 종소리다. 여기에서부터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음악이 잉태되었다.
리히테르, 페투호프, 루간스키에서 임윤찬까지.
최고의 명연주를 감상한다.
강사 프로필: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클라라하우스 대표, 포니정홀 운영사 대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공부했다. 경인방송 음악전문 PD, 고양문화재단 공연기획팀을 거쳐 현재 전문음악살롱 클라라하우스와 HDC그룹 포니정홀을 운영하고 있다.
클라라하우스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강의자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피아노협주곡, 첼로 소나타>
1월 5일 오후 7시, 1월 6일 오후 4시
(파랑카페)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는 한
내 영혼 속에 완전히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때로는 나의 소심함이 때로는 질투가 나를 괴롭게 하였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게도 진심으로 그렇게도 나즈막히
언젠가 신이 당신에게 다른 사랑을 준다해도...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시에 세르멘치예프가 곡을 붙인 러시아 로망스의 가사이다. 흔히들 러시아 음악은 우리 정서와 비슷한 한을 담고 있다고 한다. 모진 자연을 감내하며 대륙을 일구어온 그들의 인내는 음악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글린카에서 시작해서 러시아 5인조,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에 이르는 위대한 작곡가 그룹이 세계 음악계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예술가곡을 ‘로망스’ 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낭만과 애환이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로망스의 대부분의 가사는 이루지 못한 연인의 슬픈 이별을 읊고 있다. 이러한 면은 기악곡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잘 드러나는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에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했다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에서조차도 러시아의 서정성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날 믿지 마오, 내 사랑, 내가 만일 슬픔에 빠져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바닷물이 썰물 때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듯
물은 사랑하는 뭍으로 돌아오기 마련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12개의 가곡 Op.14 중에 포함된 ‘날 믿지 마오 내 사랑’ 또한 떠나간 사랑에 대한 한없는 기다림을 절절한 마음으로 담아낸 간절한 연가이다. 러시아인의 사랑이 가슴 깊숙이 아픔으로 밀려온다.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를 살았던 작곡가지만 그의 음악은 철저하게 낭만주의적인 양식과 작풍을 견지했던 19세기에 자리잡는다. 끝내 조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차이콥스키의 영향과 연결됨과 동시에 러시아 고유의 민족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수많은 피아노 곡이나 로망스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전형이었다. 작곡자 자신이 탁월한 기교를 지닌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리스트와 쇼팽의 노래하는 선율에 풍부한 음향을 개성있게 덧입혀 피아노 음악 최고의 걸작들을 쏟아내었다. 당대 정상의 피아니스트였으며 피아노라는 악기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은 그 당당한 구조와 빈틈없는 짜임새뿐만 아니라 화려한 선율미와 서정성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인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 피아노협주곡 제2번 c단조, Op.18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는 이러한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성을 가장 잘 전해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향곡 제1번의 실패로 3년간이나 실의에 빠져 은둔했던 슬럼프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1917년까지 가장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던 시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명작이다.
1897년 3월 15일 완전한 참패로 끝난 교향곡 1번으로 인해서 라흐마니노프는 1900년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을 만큼 헤어날 수 없는 무감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달 박사의 치료로 눈은 녹기 시작하고 3년 만에 영혼과 육체를 모드 회복한 라흐마니노프는 이후 1917년 러시아를 떠나기 전까지 음악적으로 가장 화려한 시기를 구가하며 뛰어난 명작들을 분출했다. 그 첫 작품이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에 이어 첼로 소나타를 작곡했다. 1900년 가을부터 1901년 4월까지 작곡에 전념해 러시아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필자는 러시아 음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화 이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 전에 라흐마니노프가 거쳐 갔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둘러보았고 세계 음악계를 움직이는 그 곳 음악인들을 만났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러시아의 흐린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대자연이었다. 하얀 줄기를 거침없이 드러낸 끝이 보이지 않는 자작나무 숲, 페테르부르크 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네바강을 보면서 러시아 음악의 정수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현재 살아있는 페테르부르크 피아노 학파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타티아나 크라브첸코를 취재하면서 거동조차 불편한 그녀가 직접 피아노로 들려준 라흐마니노프의 2번 협주곡의 2악장 주제는 작곡가의 숨결마저 느끼게 했다. 60여년 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연주회 때 이 곡을 연주했다는 크라브첸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을까요? 저는 이 곡이라고 생각해요.” 라며 나즈막히 되뇌이던 거장의 쉰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협주곡의 1악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았던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첨탑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피아노 독주로 시작된다. 극도의 긴장을 유발하는 피아니시모에서 점차적으로 크레센도되어 포르티시모에 이르는 다이나믹의 변화는 전곡에 걸쳐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이어지는 현 5부의 강주와 피아노는 나란히 다정한 힘겨루기를 펼친다. 특히 1악장 재현부의 마에스토소(Alla Marcia: 행진곡풍으로)는 피아노의 당당한 도약이 거대한 러시아 대륙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으며 곧이어 코다는 잠시 평온을 이어가는 듯 하다가 이내 힘차게 고조되어 끝난다.
2악장 ‘아다지오’는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다. 이보다 더 로맨틱한 선율의 강이 또 있을까? 약음기를 낀 현의 피아니시모에 이어지는 목관군, 그리고 피아노가 드디어 셋잇단음표 분산화음을 ‘헤미올라’(hemiola) 리듬으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반음씩 하강하는 음형이 묘한 감동을 자아낸다. 이 선율 위에 펼쳐지는 독주 플루트의 애달픈 노래는 클라리넷이 받아 둘은 교차한다. 그야말로 적막한 러시아의 대평원을 떠올리게 한다. 중간부 마지막에 피아노의 화려한 움직임 뒤의 짧은 카덴차의 끝은 섬세함의 극을 보여주는 트레몰로로 장식된다. 2악장 코다의 분산화음은 승화되고 달관한 러시아인의 한을 고스란히 이야기하고 있다.
3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찬도’는 확신에 찬 승리다. 큰북과 심벌은 이 악장에서만 쓰이는데 그 효과는 대단하다. 피아노는 마음껏 기교를 자랑한다. 제2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오보와 비올라의 노래는 면면히 흐르는 선율이 매우 아름다운데 지극히 ‘라흐마니노프’적이다. 코다의 극적인 피아노의 옥타브 연타도 압권이며 거침없는 투티의 진행으로 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협주곡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러시아의 우수와 애상 그리고 대륙적인 기질은 통속적인 선율과 함께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단면을 보여준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 피아노협주곡 제3번 d단조, Op.30
작곡연대: 1909년
초연: 1909년 11월 28일, 발터 담로쉬 지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시간: 약 42분
1악장 Allegro ma non tanto
2악장 Intermezzo. Adagio
3악장 Finale. Alla breve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는 협주곡 2번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성을 가장 잘 전해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1917년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가장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던 시기에 작곡되었던 걸작이다. 1909년에 있을 미국 연주여행을 염두에 두고 이바노브카에 있는 그의 시골별장에서 작곡되어 그 해 11월 작곡가 자신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다. 미국 청중의 열렬한 환호와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태도가 교차하는 가운데, 1910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뉴욕필과의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미국 망명 후 194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는 비평가들의 악의에 찬 독설을 받으면서도 곡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누구보다도 러시아를 사랑했던 그가 조국을 떠난 후 창작의 배경이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해서 작곡의 열의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비록 타국에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러시아의 자연 속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협주곡 2번, 3번 그리고 교향곡 2번 등이 탄생했던 러시아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창작은 끝나게 된다.
협주곡 3번은, 작품을 헌정받은 요제프 호프만이 연주를 포기했을 정도로 피아노 부분은 극한의 기교와 재능을 요구하고 있다. 협주곡 2번에서 얻은 자신감에서인지, 더 방대하고 어려운 관현악법과 거대한 대륙을 상징하듯 피아노라는 악기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낌없이 담아내고 있다. 2번 협주곡과 같은 치밀한 구도는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짜임새는 풍부하고 충만하며 표현적 분위기 역시 잘 드러나 있다.
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탄토’, 현과 바순에 의한 단 2마디의 전주 뒤에 곧바로 d단조의 주제가 피아노에 의해 단아하게 펼쳐진다. 곡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이 주제는 관현악이 받아서 발전하고 장식적인 것을 더해서 1악장을 이끌고 있다. 너무도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제2주제 역시 피아노 선율에 의해 나타나는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작품 특유의 분산화음이 왼손에 의해 반주되고 오른손이 멜로디를 연주한다.
이렇다할 카덴차가 없는 협주곡 2번과는 대조적으로, 작곡자 자신이 ‘빅카덴차’라고 명명했던 ‘알레그로 몰토’의 화려한 카덴차는 그야말로 불꽃튀는 음의 향연을 펼친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음악의 전형을 보여주는 장대한 옥타브 연타와 디오니소스적인 과도한 에너지는 왜 이 곡이 피아니스트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지를 알게 해 준다. 격렬한 카덴차의 후반부에 살며시 삽입되는 플루트의 노래는 마치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선수의 승리와 평화와도 같은 평온함으로 가득 차 있다. 도입부와 같은 분위기로 이어지는 코다는 마침내 혼과 저현 악기의 피치카토와 함께 피아노의 두 번의 스타카토로 조용히 끝난다. 화려하게 끝나는 여타의 협주곡 1악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앞부분에서 이미 타오른 가쁜 격정의 숨고르기일 뿐이다. 굳이 꾸미지 않아도 충분한 매력적인 마무리다.
2악장 ‘인터메조-아다지오’는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이 애상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도입부 오보의 ‘칸타빌레’는 로맨틱한 곡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이러한 낭만적인 요소들은 너무나 눈부시게 2악장 전반에 펼쳐져 있다. 피아노는 꿈결같은 글리산도와 아라베스크 음형을 자아내며 환상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역시 거인다운 스케일감은 곳곳에서 번뜩이고 있다. 테마의 반주형식은 느린 악장 속에 골고루 퍼져 있는데 그 형식은 특히 피날레 테마를 구축하는데 일조한다. 특히 중간부의 널뛰는 피아노와 더불어 춤을 추는 바순의 노래는 러시아인의 한바탕 민속춤이 떠올려지는데 그 리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쾌하다.
포르티시모의 반종지 뒤에 행진곡 풍의 관현악으로 등장하는 활기찬 3악장 피날레는 1악장의 주제가 몇 단계에 걸쳐 더욱 변형되어 나타난다. 전개부의 ‘스케르찬도’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단 피아노의 독무대가 있으며 ‘메노 모소’로 때로 부드럽게 노래하기도 한다. 마지막 코다는 사이드 드럼, 베이스 드럼 그리고 심벌즈까지 합세해서 축제의 클라이맥스를 마음껏 즐긴다. ‘몰토 마르카토’의 피아노의 당당한 도약은 오케스트라에 조금도 눌리지 않고 작열한다. 셋 잇단음표로 돌진하는 피아노의 프레스토가 되어 전합주로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라흐마니노프가 1932년 미국 망명중인 인생의 황혼기에 월터 쿤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음악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서 러시아의 낭만을 마칠까 한다. 평론가들의 악의에 찬 비판에 시달리면서 조국 러시아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향수로 외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타국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음악관을 이렇게 한 편의 시어로 압축하고 있다. 가슴에서 솟아나 가슴으로 얘기를 걸어오는 것은 바로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음악이기도 하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은 달빛 환한 고요한 밤, 또는 한여름날에 잎사귀들이 수런대는 소리. 음악은 황혼녘에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음악은 가슴에서 솟아나, 오로지 가슴으로 얘기를 걸어온다. 그건 사랑이다! 음악이라는 여신의 자매는 시(詩)의 여신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슬픔!”
음반소개
1939년에 녹음된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피아노를 담당했다. 총 35분의 연주시간은 보통 40분이 넘는 연주에 비하면 매우 빠르게 느껴진다. 작곡가의 숨결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녹음이다. 망명한 타국에서의 참을 수 없는 격정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MonoPoly GI-2030)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라흐마니노프는 여성 연주자라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도약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특히 1악장 카덴차 전의 ‘아첼레란도’는 오케스트라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의 속도감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평이한 카덴차를 사용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라이브에서의 현장감이 충실하다.(Philips 446 486-2)
마지막으로 미하일 페투호프의 ‘Live in Bolshoi’ 앨범이다. 1998년 3월 26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피터 페라넥 지휘의 볼쇼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연주 실황이다. 거칠다고 느껴질 만큼 대륙적이고 확장된 사운드를 보여주는 오케스트라와 불꽃튀는 대결을 이끌어가는 페투호프의 당당한 피아노는 난곡인 3번 협주곡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1악장 카덴차에서 그 어느 연주가도 범접하지 못하는 치밀한 구도로 팽팽하고 긴장된, 그러면서도 끝내 폭발하는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라이브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 그대로 녹음에서 포착된 뛰어난 음질을 자랑하는 명연이다. 필자는 이 연주를 듣고 아쉬케나지, 에레스코, 키신의 3번 협주곡 음반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3악장이 끝나고 길게 이어지는 청중의 박수는 러시아 특유의 여운을 남긴다.(Opus 91 2672-2)
악기편성
플루트 2 / 오보 2 / 클라리넷 2 (B♭, A) / 바순 2 / 혼 4 / 트럼펫 2 (B♭, A)
트롬본 3 / 튜바 / 팀파니 / 사이드 드럼 / 심벌즈 / 베이스 드럼 / 현 5부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g단조
작곡연대 1901년 여름
초연 1901년 12월 2일 모스크바
대평원(大平原) 속에 피어난 서정과 열정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843)
첼로 소나타 g단조, Op.19
1. Lento - Allegro moderato
2. Allegro scherzando
3. Andante
4. Allegro mosso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를 살았던 작곡가지만 그의 음악은 철저하게 낭만주의적인 양식과 작풍을 견지했던 19세기에 자리잡는다. 끝내 조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차이콥스키의 영향과 연결됨과 동시에 러시아 고유의 민족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적인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하며 1943년 3월 28일 아침, 암으로 파란으로 점철된 생을 마감했다. 요제프 호프만은 라흐마니노프의 인간적인 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라흐마니노프는 강철과 황금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손은 강철이었고 가슴은 황금이었다. 그 위엄어린 존재를 생각만 해도 내 눈은 눈물에 젖는다. 이 숭고한 예술가에 대한 나의 찬사는 인간에 대한 나의 애정이며 이는 어디에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강철같은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휴머니즘. 이것이야말로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본질이며 이는 피아노를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라흐마니노프=피아노’ 라는 등식은 가장 선명한 실체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어찌 대 작곡가의 영역을 피아노에만 가둘 수 있으랴.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외에 첼로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1893년에 ‘2개의 살롱 소품집’ 만을 작곡했던 바이올린과는 달리 첼로를 위해서는 걸작들을 안겨주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라흐마니노프로서는 인간적인 악기인 첼로를 선호했을 법하다. 또한 실내악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던 그의 할아버지 아르카디 라흐마니노프는 노련한 첼리스트이기도 했다.
1897년 3월 15일 완전한 참패로 끝난 교향곡 1번으로 인해서 라흐마니노프는 1910년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을 만큼 헤어나올 수 없는 무감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달 박사의 치료로 눈은 녹기 시작하고 3년만에 영혼과 육체를 모드 회복한 라흐마니노프는 이후 1917년 러시아를 떠나기 전까지 음악적으로 가장 화려한 시기를 구가하며 뛰어난 명작들을 분출했다. 그 첫 작품이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에 이어 역시 걸작으로 남아있는 첼로 소나타를 작곡했다. 첼로 소나타 g단조는 이전에 작곡한 두 작품과 같은 소재로 만들어졌다. 선율이 빚어내는 영감은 모음곡2번과 협주곡 2번을 되불러오며 교향곡 2번을 예고한다,
두드러지는 것은 피아노의 지배적인 역할인데 이로 인해서 두 악기간의 균형은 종종 균형을 잃는다. 2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짠도에서 피아노의 난이성은 배가되는데 섣불리 달려든 피아니스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은 작품의 정확한 제목이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라는 점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다. 하지만 첼로의 활약 또한 눈부시다. 쇼팽의 소나타에 의지한 점이 보이는데 이것은 4악장 구성이라든지 두 번째 악장에 스케르쪼가 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에게서 ‘헌정’ 이란 예의 차원을 뛰어넘어 일종의 우애관계로까지 발전되는 것이었다. 이같은 헌정의 양식은 감사하다는 것과 빚을 졌다는 표현에서 그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알게 해준다. 당대의 위대한 첼리스트였던 아나톨리 브란두코프는 작곡가에게 첼로 음악에 대해 다채로운 영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곡을 헌정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브란두코프는 1901년 12월 2일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반주로 이 멜랑콜리한 ‘비가(悲歌)’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렸다.
1악장, 첼로의 지극히 절제된 약음으로 나오는 도입부는 이내 피아노가 대응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한다. 사랑으로 인내하는 기다림. 터질 듯 말 듯 두 악기는 얼굴을 쳐다보며 마침내 제 1주제를 노래한다. 전개부 후반부의 주제의 화음을 따르는 피아노의 카덴차를 거쳐 첼로가 가담하여 일구는 클라이맥스는 거대한 러시아 대륙의 몰아치는 눈보라와도 같다. 코다의 힘찬 도약은 2악장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알레그로 스케르짠도’ 악장은 낮은 음의 피아노가 ‘정중동’의 징표인 양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스타카토로 세밀하게 차고 나가는 피아노와 그에 걸맞는 첼로의 긴장감 있는 약동은 최고의 스케르쪼를 만들고 있다. 얼핏 흥겨운 무도회의 한가운데에 와있는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작곡가 특유의 가슴을 짓눌러오는 로망스가 곳곳에 애처로운 눈망울로 촉촉이 배어있다. 그야말로 극한의 기교를 감내해야 하는 피아노는 오히려 조연을 벗어나 종횡무진 오선지를 누빈다. 하지만 첼로와 대결구도는 아니다. 첼로와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각 성부의 어우러짐은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서로를 감싸안고 있다.
3악장 안단테는 그대로 ‘엘레지, 비가(悲歌)’ 이자 아련한 이별의 아픔을 그리는 사랑노래이다. 촉촉한 피아노의 분산화음이 러시아의 쇼팽을 느끼게 한다. 첼로가 같은 주제를 숙연하게 연주한다. 러시아의 가을하늘이 생각난다. 흐리다 못해 어둡기까지 한, 눈물이 날 만큼 낮게 드리운 구름들... 그리고 그 하늘 아래에 대평원이 있고 초가을, 벌써 잎이 떨어지고 있는 하얀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진다. 어느새 추적추적 비가 흩날린다. 이러한 자연을 감내하며 러시아인들은 예술을 빚어왔으리라. 이 느린 악장에서 왜 러시아 음악이 이래야 하는지 그 감정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중간부, 피아노의 고조됨에 첼로는 오블리가토로 노래한다. 마지막 피아노의 꺼지는 듯한 화음은 첼로의 도움으로 더욱 슬퍼진다.
4악장 웅대한 주제가 첼로에 의해 제시된다. 악보에는 ‘깊은 표현력을 가지고’ 라고 적혀있다. 3악장의 슬픔을 삭이고 다시 일어서는 결연에 찬 의지의 소산이다. 더블 스토핑(중음주법)과 피치카토도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자유로운 전개에 이어 비바체의 코다에서 약진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곡은 단말마를 외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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